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1.현상학 입문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 또는 현상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이 때 “현상”은 어떤 대상의 내용적 특성이라기보다는 대상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각기 자기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내고 우리에게 달리 주어진다. 즉, 현상학은 다양한 대상이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어(appears) 우리에게 주어지는가(givenness)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명종 시계에 대한 현상학적 관점
단 자하비는 자명종 시계를 현상학적으로 고찰하여 설명하였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자명종 시계의 특정 면 만을 볼 수 있지만, 그 면 말고도 많은 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있다(그렇지, 지금 나는 노트북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 모니터 뒤의 판은 흰색이고, 13인치고, c타입으로 충전하고…).
우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면 외에도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명종 시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배경 안에 존재한다(그렇지, 지금 나는 노트북 모니터와 책을 돌아가며 보고 있지만, 노트북과 책이 놓여져 있던 책상은 검정색이고, 외발이고, 옆에 마우스가 놓여져 있고, 오랜만에 온 카페 도노즈 안에 있고..)
“지각 경험은 결과적으로 현전과 부재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결코 고립된 상태로 주어지지 않고, 보는 것의 의미를 촉발하는 지평(horizon)에 에워싸인 채로 주어진다.”
자명종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자명종에 집중하고 있지만, 실은 그 앞에는 다른 컵, 펜, 책 등이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관심은 아니고 배경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원래는 배경이었던 자명종 앞의 책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내가 지금 타이핑을 하면서 난 모니터에 쓰여지는 글씨에 집중하고 있고, 열심히 움직이는 내 손가락은 전혀 신경도 안쓰다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 손가락이 얼마나 열일을 하고 있는지 바라보게 되는 것같이..)
“실제로 이러한 주제의 변화 가능성은 정확히 나의 주제가 그 변화와 함께 주어지는 장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장 안에서 내가 정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한편 그 자명종은 지각하는 자의 신체를 통해 지각된다. 신체적으로 보고, 만지는 등 상호작용을 하며 자명종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즉, 지각을 한다는 것은 “부동의 정보 습득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체적 활동”이다. (모니터, 책, 컵, 마우스 등등은 눈으로 인식하고, 손가락으로 타이핑하고 만지는 등을 통해 알게 되는 것 같이..)
그리고 그 자명종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은 순간적이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적 구조와 배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처음 그 조명종을 마주했을 때보다 2분 지난 후, 그리고 10분 지난 후, 그리고 지금.. 그 자명종은 나에게 점차 다르게 자신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르게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바탕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기대를 가지고 현재를 접한다.” ‘저 자명종을 우리 사무실에 가져다 두기에도 적절하겠다’라는 판단은 그냥 자명종을 보자마자 생기는 판단이 아니다. (지금 내 노트북은 내게 너무 소중하고, 너무 소중하고, 너무 소중하다.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샀고, 지금 공부하느라 매일같이 쓰고 있고, 내일도, 모래도, 글피도,, 계속 계속 내 도구가 되어줘야하니까..)
한편, 그 자명종은 누군가에게는 절대 집에 둘 수 없는 자명종일 수 있다. 즉, 그 자명종은 나에게 나타났지만,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은 내게는 너무 두근거리고 행복한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책일 수도 있겠지.)
3. 나타냄과 실재
무엇인가가 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인가, 그것의 배후에 있는 우리가 밝혀내야 할 어떤 진짜가 있는 것인가?
고전적으로 과학과 철학은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찾고자 하였으나, 현상학은 그 현상이 주는 것이 바로 그 자체로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현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감추고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다만 현상학자에게는 “그 자체로 현전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이해될 수 있는 세계(현상학적 관심)”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과학적 관심)”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두가지 현시(manifestation) 방식의 구분일 뿐이다.
“현상학자들은 접근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저편으로 말미암아 객관적 실재성을 정의하기보다 객관성을 지정할 올바른 장소가 저편이 아닌 나타내는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4. 나의 성찰
나는 결과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래서 뭘 해야 하는건데?”
어쩌면 ‘나보다도 성격이 급하고 정확하고 의미있는 결론을 최대한 빨리 듣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교수님’의 ‘가뜩이나 바쁜 회진 시간’에 ‘회진을 가이딩’하며 환자를 ‘daily로 브리핑’하면서 얻은 습관일 수도 있고, 고민을 하는건 너무 소진 되는 일이니 빨리 결론을 내는 게 속 편한 아빠의 유전적 소인 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난 결론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여전히 좀 그렇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내가 아는 결론은 그래봐야 특정한 경계 안 에서의 진실일 뿐이고, 그 경계 밖 세상까지 고려한다면 그 진실에는 의문을 약간 남겨놓아야만 했다. 이것이 모든 의학 및 간호학 논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Limitation. 모든 결론은 그 Limitation안에서 해석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이런 인식을 하던 차에 만난 것이 바로 현상학이었다. 모든 객관성을 지정할 장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현상학. 현상학은 나에게 내가 평소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어야 할 철학이라고 자신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