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상학에서 본질은 무엇인가?
철학자는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본질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단 자하비도 “철학자로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연한 특징과 우연한 속성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설은 생활세계, 지향성, 체화, 시간성 등 근본적인 주제의 불변하는 보편적 구조를 찾고자 헌신하였다.
한편 본질을 찾는 능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에서 문제없이 채택하는 능력이다(우린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이 다 어떤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암묵적올 알고 있으며, 책장 사이에 노트북같이 우연하고 우발적인 것이 껴 들어가 있을 때 쉽게 구분해낼 수 있다). 어떤 대상의 본질적 구조를 찾기 위한 형상적 변경은 일종의 상상의 도움을 받는 개념적 분석이지 누구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이 아니다.
또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통찰은 변형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디지털 책이 책으로 간주되어 책의 개념이 달라졌듯이). 그리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연구되는 대부분의 대상들은 본질적인 모호함으로 특징지어지고,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분류와 기술은 본질상 근사치적이기도 하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대상에 정확성과 정밀성을 본질로 부과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이다.
2. 본질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우리의 탐구는 실제로 주어진 것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우리의 탐구 방법은 특정한 과학적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당면한 주제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후설이 “참된 방법은 탐구되어야 하는 사태들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 같이 말이다. 모든 것은 그 영역에 적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환원주의는 대상을 자연과학적 방법과 원리 중 가장 간단한 것으로 환원시키며, 제거주의 또한 자연과학의 방법과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제거해버린다(의식 또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또한 과학적 자연주의는 방법적으로도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도출된 것 만을 참으로 여긴다. 즉, 과학적 환원주의, 제거주의, 과학적 자연주의등 (낯설지 않은 이런 방식들은) 사회학과 인문학 등의 현상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 가치가 없다고 간주해버린다.
정말 그러한가?
결코 그렇게 볼 순 없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생활 세계가 과학에 의해 망각되고 억압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 조차 생활 세계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메를로 퐁티의 주장대로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연과학만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며, 우리의 경험세계는 그 나름의 타당성과 진리가 있으므로 과학의 승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자연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탐구해나가야 한다.
3. 나의 성찰
내가 다루는 간호 현상은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간호 현상을 숫자로만 측정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간호 현상이 가진 풍부한 색깔을 가리는 일이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본질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은 뭔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본질이라고 하면 일단 딱 떨어져야만 할 것 같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간호 현상의 그 모호한 본질을 찾기 위해 자연과학적 방법 뿐 아니라 현상학적 질적연구라는 도구 또한 장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