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담는 그릇.

(2009년 ,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큰 그릇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왕이면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사람을 마음에 품고 싶었습니다.

깨끗한 그릇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분별된 깨끗한 그릇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

큰 그릇보다도, 깨끗한 그릇보다도

 

아픔을 담는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간호대학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한지 3년..그리고 이제 4년째입니다.

 

그동안의 간호학생으로서의 시간을 돌아보면, 제 안의 간호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은 0.01%도 안됐던 것 같습니다. 음..좀 더 솔직히 말하면 간호사가 별로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간호학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간호가 목회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돌보는..가장 기본적인 정신이 목회와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교회를 좋아했던 전 이런 간호학에 그냥 빠져버렸던것 같습니다.

 

그러나..지나온 3년을 돌아보면 제 간호학생으로서의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간호사가 되길 준비했다기 보다, 간호의 기술과 정신이 언젠가 목회에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큰 그릇이 되고 싶어서..

나중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리더가 되길 원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깨끗한 그릇이 되고 싶어서..

왠만하면 더러운 것, 나쁜 것 보지 않고 살고싶어 했었습니다.

 

졸업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간호의 현장에 직접 발을 들인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전 어제..

저의 그 큰 그릇과 깨끗한 그릇에 대한 소망을 깨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간호의 현장은 역시 고상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치열하고 더러운 전쟁터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온갖종류의 아픈 질병들을 가지고 온 사람들의 고름과 냄새를 맡고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그리고 눈을 찡그리는 나 자신을 보며 채찍질하게 될..

그런 저의 외적, 그리고 내적 전쟁터가 될 곳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몇 안되는 사례만 듣고도 전 철렁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붙드며 벌써부터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전 단 한명의 환자도 돌볼 자격이 안되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냄새 맡기 싫었고, 그런 더러운 것 보기 싫었습니다.

그런 사람과 마주하기 싫었고, 그런 아픔을 같이 지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아버렸습니다.

 

내 그릇은 티스푼 하나의 사이즈도 되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는 것을.

큰 그릇이 되고 싶어 일반 간호사로 남고싶지 않았습니다.

 

전문간호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정책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꿈을 계속 꾸고 싶어 했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마주하게 될 환자 한명도 제대로 품지 못할거였으면서..

깨끗한 그릇이 되고 싶어 일반 간호사로 남고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더러운 것, 냄새나는 것, 흉악한 것.. 보고싶지도 느끼고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치열한 공간 가운데서 오래 버티고 서있고싶지 않았습니다.

 

하루빨리 고상한 공간에서 우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허황되고 기가막힌 꿈을 꾸고 있었는지..

당장 한 사람도 섬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상을 섬길 꿈을 꾸고 있었는지..

정말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제 가슴이 민망해져왔습니다.

 

섬김의 리더십. 예수님의 리더십.

고개를 끄덕였으면서도..”섬김”과 “예수님”에 공감하기보다 “리더십”에 공감해왔던 제 자신또한 드러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역시 제 안에 있던 리더십의 개념은 지휘와 통치의..세상적인 영향력이었습니다.

 

하루빨리 세상적으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했었습니다.

 

이 어찌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무릎꿇으심이 기억났습니다.

제자들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한명 한명의 발을 닦아주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낮아지심이.. 제게 이제서야..이제서야 다가왔습니다.

그분의 종 되심에.. 이제서야 제대로 부끄러워졌습니다.

 

‘내가 이런 얼토당토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스스로 크리스쳔 리더라도 믿고 살아왔다니..’

 

그리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품고 있던 큰 그릇과 깨끗한 그릇에 대한 소망을 깨어버리리라.

비록 적은 사람을 품게 될지라도, 그리고 그의 아픔 덕에 내가 아주 깨지고 더러워질지라도..

 

아픔을 담는 그릇이 되리라. 아픔을 담는 그릇이 되리라.

나는 종이다. 나는 종이다.

 

아.. 정말 노력 하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내 안에 꽉 차 있던 엘리트 의식을 깨어버리려는데..이게 아주 반항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답답….하면서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놀라운 방법으로 주신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해..

전 오늘부터 이렇게 새로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올 일년동안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그 땅에서 가장 낮은 종으로 가장 잘 섬길 수 있도록 마음과 태도, 그리고 잘 섬길 능력을 준비해 가렵니다..

 

 

 

 

하나님.

아직 저는 큰 그릇과 고상하고 깨끗한 그릇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버려버리지는 못했지만..ㅠㅠ

저로 하여금 아픔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소서.

그 아픔을 담아 저도 아프고 저도 망가지게 될지라도

예수님 당신이 가셨던 그 삶처럼..예수님 당신이 품으셨던 그 아픔처럼

저로 하여금 아픔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6-7

 

(2009년 ,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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