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이 온다

90년대생이 온다.
임홍택 저.

비록 난 86년에 태어난 80년대 생이지만, 밀레니얼 세대로 구분되는 세대로 이 책에서 말하는 90년대 생의 특성을 상당히 많이 지니고 있었다.

뭐, ‘줄임말’이라던지 ‘병맛’을 좋아하진 않으나, ‘일’을 대함에 있어 워라벨이라던지 일터에서의 즐거움, 일터에서 실현하고 싶은 자아, 자유로운 휴가를 추구하는 자세 등은 나의 모습과 같았다.

그런 차원에서, 상당히 이해하고 적응하기 어려웠던 병원이라는 조직에서 10년을 버텼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를 토닥이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 라는 ‘자아’가 강하고, 할말을 담아두지 못하고 해야만 하는 ‘추진력(?)’을 지닌 요상한 젊은이에게 적응해 준 우리 조직에도 감사하다. 적응 해주셔서 망정이지 이곳이 아닌 다른 부서에 있었더라면 진작에 다른 살길을 찾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병원은 넓고, 복잡하고, ‘기존’ 조직’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보니 점점 신규 간호사 및 병원의 일반직 사직률이 높아지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아마도 90년대생은 ‘나’라는 존재를 도저히 받아주지 못할 것 같은 대형병원이라는 조직에 회의감을 갖고 포기해버렸을 것이고, 병원은 이렇게 통통튀는 것 같아 보이는 90년대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에는 기존의 상식에 비추어 봤을 때 도저히 이해도 안되고,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너무나도 많은 이해당사자가 엮여있기에 감히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조차 설정이 안됐을 것 같다.

나의 사례를 돌이켜보면,

1)일단 내가 속한 부서가 15명내외의 작은 규모의 부서였고(인력 운용이 아주 복잡하지 않을 수 있는),

2)부서 안에서 구성원들끼리 듀얼잡/트리플잡이 가능하게 훈련되었고(배워야 할때는 상당히 괴로웠으나),

3)리더십이 비록 기존세대이지만 귀를 닫고 있지 않았고, 구성원이 조직에 헌신하는 만큼 그 구성원의 니즈를 이해해주었다(실제로 리더십의 결단력과 포용력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리더십이 요구한 것은 조직의 발전을 위한 구성원의 몰입이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나 자신이 이 조직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했고, 가능하면 이 조직을 통해서 내 스스로가 발전함과 동시에 나의 일터 밖에서의 시간도 존중받는 것이었다. 아마 서로 100%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는 정도로 맞춰오지 않았나 싶다.

90년대 생이 옳은 것도, 기존세대가 옳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90년대생은 이런것이고, 기존세대는 이런것일 뿐.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90년대생에게도 기존세대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쌍방의 노력이 있다면 분명히 긍정적인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이도 알고 저도 이해하는 세대로서의 역할을 해나가야 겠지.
내가 벌써 꼰대가 됐나? 라고 생각해본적 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충분히 의미가 있다!

(2020.1.6. 페이스북 기록물)

윤리적으로 질적연구 수행하기 (1). 익명성 지키기는 쉬운가, 어려운가?

연구에서 “익명성”을 지킨다는 것.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질적연구에서 익명성이 지켜지지 않은 사례

한번은 대학원 동료로부터 어떤 사례를 들었었습니다.

해당 연구에서 대상자를 모집하기가 쉽지 않아 어떤 인터넷 자조모임 카페를 통해 모집을 했다고 합니다. 모집이 쉽진 않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되었고, 인터뷰를 잘 진행하게 되었고, 연구 결과를 보고할 때도 일반적인 질적 연구 보고와 같이 실제로 대상자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보고했다고 합니다. 물론 익명으로 보고가 되었지요.

그런데 그 연구가 보고된 이후, 참여자로부터 문제제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이 한 말이 그대로 인용될 줄은 몰랐다구요.

그 이후 다시는 그 자조모임 카페에서 연구 관련 모집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까요?

전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1. 사전에 연구자가 대상자에게 녹취된 내용이 그대로 인용될 것이란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실제로 익명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1번이라면 아마도 대상자에게 연구를 설명할 때, “익명성”이 지켜진다는 것은 강조하면서도 “인용문”이 그대로 보고될 것이란 것은 강조하지 못하면서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상자에게 연구를 설명할 때 이 부분을 최대한 강조하여 인지하실 수 있게끔 하고 있습니다.

2번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럴수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구자가 전혀 의도치 않았더라도 까딱하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질적연구에서 “익명성”을 지킨다고 하면, 그 내용을 누가 말했는지에 대해 인용하면서 가명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구 대상자가 희귀하거나, 특수할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단이 좁을 수록 익명에 가려져 있는 대상자를 특정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구 보고서에는 대상자의 특성이 별도로 보고가 되기도 하고, A라는 사람이 언급한 말 몇 마디에 A가 누구인지 금새 추측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한 다른 이야기들이 줄줄이 다 노출이 되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저렇게 인터넷 카페를 통해 모집을 했고, 누가 그 연구에 참여했는지를 어느 정도 알거나 추측할 수 있는 경우에는 더욱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 보고를 할 때 익명성은 단순히 가명을 쓰는 것으로 커버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상자 자신이, 원치 않게 공중에 드러났다고 느끼게 됐다면, 그 연구는 분명 윤리적이지 않은 연구가 되어 버립니다. 연구자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말입니다. 이를 연구자가 뒤늦게 알게된다면.. 정말 큰 죄책감을 갖게 되겠지요.

Confidentiality is a separate issue from anonymity but also important. In
research where words and ideas from participants are used, full confidentiality cannot be promised, especially as qualitative research contains quotes from the interview data. In these studies, confidentiality means researchers keep confidential that which the participant does not wish to disclose to others. Patients, in particular, sometimes disclose intimate details of their lives which the researcher cannot divulge, although the information could be useful for the research. Hammersley and Traianou (2012) discuss the issue of privacy in particular as qualitative research often involves inner feelings and thoughts of participants.

Holloway, I., & Galvin, K. (2023). Qualitative research in nursing and healthcare. John Wiley & Sons.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이 연구에서 인용문이 익명으로 인용될 수 있음을 대상자가 분명히 인지할 수 있게끔 설명해야 합니다.

둘째로, 질적연구는 반복적인 동의의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상자가 연구 동의서에 서명했다고 하여 모든 것이 다 허용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대상자가 연구동의서에 서명하기 전에, 연구 참여는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고 미리 안내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인터뷰 중 취소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인터뷰 녹취가 끝난 후에 취소하는 것일 수도 있고, 연구 분석이 끝난 후 연구 보고 직전에 취소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대상자에게 그럴 권리가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즉, 연구가 보고되는 시점까지 대상자가 그 연구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야합니다. 분석 결과가 대상자의 의도와 다르지 않은지도 검토받아야 하고, 보고가 되기 전에 어떻게 보고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검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Consent in qualitative research is an ongoing process. Whilst consent may be implied in one phase of the research, it cannot be assumed at another stage when the researcher’s ideas change on the basis of the information provided, or indeed, when participants change their minds. Thus, consent is not a once and forever agreement by participants but requires ongoing consent. For a discussion of the complexity of these staged issues in relation to negotiating the journey of a qualitative research study, see Redwood and Todres (2006).

Holloway, I., & Galvin, K. (2023). Qualitative research in nursing and healthcare. John Wiley & Sons.

그리고 참가자를 식별할 수 없도록 참가자에 대한 사소한 정보를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에서는 나이가 연구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면 모든 참가자의 나이를 2-3세 정도 변경하기도 합니다(이 또한 대상자의 동의가 있어야겠지요?). 대상자가 동의한 연구자만이 정확한 신원과 녹취록, 분석보고서를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Researchers sometimes change minor details about the participants so that they cannot be identified. For instance, researchers may change the age of all participants by two or three years when age is not an important factor in the research (Archbold, 1986). This of course must be reported in the research account without giving exact particulars. Only the researcher should be able to match the real names and identities with the tapes, report or description.

Holloway, I., & Galvin, K. (2023). Qualitative research in nursing and healthcare. John Wiley & Sons.

저도 희귀한 질환을 가진 대상자를 연구하다보니, 이런 부분에 특히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보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여자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요한 순간 순간에 (분석&보고)에 대상자에게 확인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일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다행히 처음 연구 동의를 구할 때, 향후 “의미 검토 과정”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동의를 받아 두었습니다. 원래는 현상학적으로 “상호주관적 검증”을 위해 넣어둔 장치였는데 (일반적으로는 삼각검증의 목적으로 넣어둘 수 있겠지요), 윤리적으로도 맞는 것 같습니다. 이 때, 어떤 식으로 인용문이 보고가 될 예정인지에 대해서도 확인을 받으려고 합니다.

아! 이런 향후 추가 연락에 대해 미리 동의를 받아두는 것도 중요한데, 왜냐면 대상자는 인터뷰 이후에는 다시 연구와 관련하여 일절 연락 받길 원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 참여자를 지키면서 연구하기.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엄마를 미안하게 만들면 나라가 망할..껄..?

경제학적으로 사람은 나라의 돈이고 경쟁력이다. 그런데 나라 곳간이 비워져 가고 있다.
곳간을 다시 채워보려고 이것저것 정책이 나왔지마는, 아직 터닝포인트가 될만한 정책은 등장하지 않은듯 하다.

여성의 학력과 사회적 지위, 경제적 가치가 높아졌지만,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 그 학력과 사회적 지위, 생산력은 죄책감의 이유가 된다.

아이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동료와 조직 리더에게.
왜 그래야 하지..? 왜 엄마라서 미안해야 하지..?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1) 옆을 못지켜 줘서 미안하고.
2) 대신 고생 하실 부모님께 죄송하고(조부모님이 아이를 봐주신다면)
3) 그 미안함을 견딜 수 없어 결심하고 휴가라도 내면 그 자리를 채워야 할 동료에게 미안하고.
4) 다른 직원과의 형평성을 따져야 할 리더에게 죄송하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방과후 등을 통해 아이들을 국가가 대신 봐주는 것보다, 엄마가 일하다가도 필요할땐 죄책감 없이 아이에게 갈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 건데.. 그것이 그리도 어려운가보다.

육아휴직, 육아기 단축근로, 탄력근무 등등이 있으면 무엇하나. 그 빈자리를 메꿔서 직장을 돌아가게 할 인력이 없는데.

나는 그래도 상당히 배려 받는 환경이고 부모님의 도움도 받는 매우 감사한 포지션이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부모님께, 동료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엄마라서.

아이가 초딩이 되며 많은 여성이 그간의 경력을 내려 놓는 다는 것이 남일이 아니다. 이것또한 경제적 손실

출산률이 낮아진다지만 그것을 애써 높이는데 기여할 생각이 안드는 것도 사실이다. 기여한 공을 인정 받기는 커녕, 부담이 상상도 못하게 더 커질게 보인다.

어떻게 안되려나..

(2019.12.11. 페이스북 기록물)

나의 위경련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체험 분석

도입

급성 위경련이 왔다.

현상학적 질적연구를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현상학적으로 나의 경험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이남인(2005)에 의하면, 연구자와 연구참여자가 동일한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의 “해석”보다 높은 수준의 명증성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객관성을 담보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 다른 경험자의 상호주관적 검증이 있을 경우 그 객관성을 높일 수 있게 된다. 다른 위경련 체험자들의 경험들이 여기에 덧붙여지길 바라본다.

이 글은 위경련이 발생하고, 사그러든 날 밤에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경련 경험

어제부터 감기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오늘새벽부터 오한이 들었고, 열은 38.4-6을 왔다갔다 했다. 열이 나도 오한이 없으면 그래도 좀 살만했다. 다행히 오늘 진료는 휴진이고, 치료 예약된 환자만 두어명 있어서, 약먹고 버티면 크게 어렵지 않은 여유로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다만 약 먹고 오한이 떨어지는 것은 3시간을 못버텼다. 컨디션이 영 아닌것 같았다. 그런데 그와중에 배는 또 고파서, 오한이 떨어졌을 때 뭐라도 먹자 하고 비타민 충전한답시고 샐러드를 먹고, 뭔가 아쉬워서 빵도 먹었는데..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처음엔 “어 뭐지? 체했나?” 싶었다.

원래 난 피곤할 때 뭘 먹으면 윗배가 빵빵하게 부풀면서 아프다. 난 원래 이 상태를 체했다고 표현하는데 이때는 바로 누우면 좀 나아지곤 했다. 그래서 동료 간호사에게 잠깐만 누워있을께 하고 누웠는데 이상했다.  이건 어떤 자세도 통하지 않았다. 한참 자세를 찾고 있는데 통증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고, 서랍안에 넣어 두었던 위경련약이 생각났다. 라미나지액이라는 약인데, 이전에 위경련 있었을 때 의사선생님이 이건 본인도 프랩해놓고 급할때 먹는다고 하셨던 약이다. 책상앞에서 쪼그려 앉아 우겨 넣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로 갔는데 그 침대가 내가 올라가기에 너무 높아보이기 시작했다. 도저히 저 불안한 침대에서 쪼그려 누워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쪼그려 엎드렸다. 안보이는 곳이니 상관 없었다. 그렇게 쪼그려 엎드려있었는데, 옆 베드에서 치료를 받는 아이가 도착했다. 이제 보여질 수밖에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나에게 편한 자세는 없었지만, 그나마 엎드려 쪼그려 누워있을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점점 나의 호흡은 가빠지기 시작했고, 옆의 베드에 누워있는 아이와 보호자가 알아챌것 같이 끙끙 거렸다. 어쩔수가 없었다. 눈치채게 하고싶지 않았지만 지금 그런걸 따질수는 없었다. 온몸에서 땀이 척척하게 스며나왔다. 상의부터 하의까지 모든 옷이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는게 느껴졌고, 이 통증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개미같은 목소리를 겨우 내어 동료 간호사에게 “주사실에 맞을만 한게 있나 연락 좀 해줘” 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엎드려 끙끙 앓고 있었는데 동료간호사가 나에게 와서 다시 물어봤다. 난 목소리를 낸다고 했는데 거의 안들렸었나보다. 내가 주사실…하고 웅얼거리자 알겠다는 듯이 급하게  나갔다. 그러더니 시니어 선생님을 데리고 왔다.

시니어 선생님이 쪼그려 누운 내 뒤에서 따뜻한 물을 좀 먹어보지 않겠냐고 권하셨던 것 같고, 나는 아무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것은 무슨 통증일까. 괜찮아지긴 하는걸까. 빨리 약.. 약..

급하게 외래의 진료를 잡아주었고, 대기가 3번째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난 몇보 앞의 진료실을 갈 자신이 없었다. 그냥 약.. 빨리 약..

도대체 이 통증은 무엇있가..? 이건 통증 scale 10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통증을 자주 겪을수 있다는 암환자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까.. 그들의 통증은 조절이 되긴 할까 라는 연민 아닌 공감을 느꼈다. 이러곤 도저히 살수 없다. 위에 구멍이라도 내고 싶을 정도로 아픈 이 통증은 참을 수 있는 통증이 아니다. 극도의 생리통일때는 자궁을 떼버리고 싶었고, 오늘은 위에 빨대를 꽂고 싶었다.

거의 혼절 직전에 이르렀는데, 교수님이 너무 급해보인다고 일단 약 먼저 처방해주었다 하였다.일단 다행이긴 했는데 내가 과연 주사실로 갈 수 있을까.. 도저히 난 거기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침대 앞에 휠체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고마웠지만 고마움을 챙겨 말할 새도 없었다. 일단 이건 타야겠지.. 휠체어 타려고 겨우 비틀거려 내려왔는데 그제서야 내 머리카락도 다 젖어있었다는 걸 알았다. 겨우 비틀거리며 휠체어에 앉았고, 다리를 들어 발받침 위에 발을 올렸고, 난 허벅지에 쪼그려 엎드렸다 .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이동시켜주기 시작했다.

갑자기 너무 추웠다. 복도로 나온것 같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있어서 그런거였겠지만 너무 추웠다. 한편 시원한것 같기도 했다. 열이 식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속이 울렁거리가 시작했다. 아무래도 침이 고이려고 하는게 심상치 않았다. 주사실은 얼마나 남은걸까 하고 올려보았더니 한 3m 남았더라. 그래서 말했다. “아무래도 토할것 같어..”

“어, 토할것 같으세요?”라는 긴박한 목소리가 들리며  주사실에 safe하듯이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여러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와줬고, 토할것 같다는 얘기에 바로 쓰래기통을 집어 주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난 받자마자 토를 했다. 위가 쥐어 짜지면서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아까 먹었던 카스테라가 아직 소화가 덜 된 것 같았다. 걸죽한 반죽이 되어 입을 통해 밀려 나왔다. 그렇게 쓰래기통을 부여잡고 토를 했고, 나는 재빨리 침상곁으로 옮겨졌다.

토를 하고나니 약간은 나아진것 같았다. 주사실 선생님들께서 나를 따뜻하게 돌봐주셨다. 어떤 자세가 편하냐고, 편한 자세로 있으시라고하며 돌봐주셨다. 물티슈도 주시고 휴지도 주셨다. 침상에 올라가서 눕는게 낫겠다 싶어 올라갔고, 토를 해서 그런가 이제는 옆으로 쪼그려 누울 수 있었다. 도저히 눈은 뜰수 없었는데 그 사이에 iv가 안아프게 놓여졌고,  처음에는 프리판이 들어간다 하였다. 약이 들어가니 일단 안심이 되었다. 단단했던 위도 조금씩 긴장을 풀려는게 느껴졌다.

아까 남편에게 “와줘…”라는 단발마의 비명을 담은 카톡을 보냈었는데 그 이후에 내가 전화도 못받고 카톡도 못받고 있으니 동료 간호사와 통화한후 부랴부랴 주사실로 왔다. 어쩔줄 몰라하며 앉아있다가 밖에 나갔다 왔는데, 시부모님께 오늘 밤에 아이들을 봐주시길 부탁해준 것이었다. 그럴필요까진 없을것 같은데.. 도저히 안되어보였나보다.. 그래도 일단 집에가서 푹 쉴수 있다는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 누워있었는데 다른 약이 하나 더 달리고, 그게 다 들어간 후에는 수액을 달아주셨다. 수액까지 달리니 이제 거의 다 된것 같았다. 나는 바로 누울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퇴근할 때가 된건지 동료 간호사가 “괜찮으세요?”하고 와주었다. 이제 일어날 수 있었다. 같이 돌아가기로 했다.

확실히 이젠 걸을 수 있었고, 옷은 여전히 척척했지만 아까만큼 춥진 않았다. 몸에 힘은 없었지만 아프지 않으니 되었다.

남편은 아픈데 죽을 먹어야지 왜 샐러드랑 밀가루를 먹었냐고 안타까워했다. 속은 괜찮을줄 알았지… 아플 때 죽을 먹으란 건 조상의 지혜인듯 하다.

현상학적 체험 분석 (사실적 현상학적 심리학적 체험연구)

감기바이러스로 인해 힘겨웠던 몸(주체)에서 발생한 급성 위경련(체험의 대상) 가운데 나는 나의 온 신경이 복부의 통증을 향해 있었음을 경험했다. 나의 위장은 부풀었고, 비틀렸고, 여러개의 칼이 사방에서 찌르는 것 같았으며, 해결되지 않은 통증에 온몸의 세포가 땀을 내며 발악을 했다(신체성). 1초는 5초같이 느리게 갔고(시간성), 겨우 힘을 내어 쪼그려 누워 나의 배를 스스로 문지르는 것은 좁은 굴 속에서 혼자 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으며, 특히 그 좁은 침대는 너무 높아보였고 불안했다 (공간성). 그 가운데 나를 들여다봐주는 사람들(동료 &시니어 간호사 선생님, 주사실 선생님, 남편, 시부모님)은 안도감을 주었고, 진심으로 감사했다(관계성).

멀미 때문이었는지 위장의 마지막 발악이었는지  구토를 한 이후에 통증은 약간 나아졌고, 주사제를 맞고나서 30여분이 경과했을 땐 확실히 편해져서 더 이상 위에 나의 신경이 집중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온몸에 근육통이 생겨서 반신욕을 해야했다(시간에 따른 전개).

나는 위경련의 상황에서 병원안에 있는 나의 검사실 구석 침대에 쪼그려서 배를 부여잡으며 119를 불러야하나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럼 분명 우리병원의 응급실로 데려다줄텐데, 응급실에선 나를 받아줄까 염려 해야했다. 또 여기서 거기 가자고 119 부르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그리고 주위의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가까운 병원 시스템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진경제만 맞으면 좀 나아질 수 있는건데.. 집에 있었가면 어떻게 했을까? 낮이라면 동네 내과를 갔겠지.. 밤이라면 어떻게 해야했을까.. 2차병원 응급실에서는 받아줬을까..나는 운이 좋게 다행이었지만, 요즘같은 상황이면 염려가 많아질 것 같았다. 아픈것도 서러운데 어딜가야 하나 고민해야 하는 건 억울한 일이다(사회성, 역사성).

급성 위경련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통증이었으며,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고, 이런 통증을 자주 경험하는 이들에 대한 애달픔을 알게 됐다. 한편 그 통증이 지나간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똑같은 일상이 되었고,  조절이 되는 통증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나는 이 통증이 사그러진 이후 “암성 통증”과 “만성 통증” 경험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이런 통증을 간헐적으로든 수시로든 지속적으로라든 경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정말 무서울 것이다. 그리고 급작스럽지만 기도제목이 하나 더 생겼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갈 땐 가더라도 통증 없이 가게 해달라고. 그만큼 무서운 통증이었다(위경련의 의미).

이건 위경련 “통증 스케일 10″이라는 숫자 이면에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의미있는 현상일 것이다.

고찰

구체적인 고찰까지 하기엔 여유가 없다. 다만, 이렇게 글을 써봄으로써 위경련 현상을 그 현상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본질적 요소의 차원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연습해보았다 할 수 있겠다. 추후 조금 더 고찰해볼 수 있으면 그 때 추가하기로 해본다.

참고문헌

이남인(2005). 현상학과 질적연구: 응용현상학의 한 지평. 한길사

현상학적 질적연구를 한다면 이 학교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 듀케인 대학교(Duquesne University)-

미국 펜실베니아의 피츠버그에는 미국의 유일한 성령수도회(Congregation of the Holy Spirit) 소속 교육기관인 듀케인 대학교가 있습니다.

만약 현상학적 체험연구(질적연구)에 관심이 있다면, 이 대학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

경험과학을 하는 학계에서 현상학을 수용하여 탐구할 때 방법론적으로 많이 따르는 학자인 반 캄(van Kaam), 지오르지(Giorigi), 콜라지(Colaizzi)가 모두 이 듀케인 학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반 캄과 지오르지는 심리학의 “듀케인 학파”의 창립 멤버였고, 이곳에서 “심리학을 위한 현상학적 방법”을 공식화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Adrian van Kaam (반 캄)

1920년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반캄은 가톨릭 사제이며, 성령수도회(Congregation of the Holy Spirit) 소속이자 신학교의 교수였습니다. 그러다 반캄은 미국 피츠버그의 성령수도회 소속 교육기관인 듀케인 대학교에 1954년에 파견이 되었는데, 신학(영성 형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인 줄 알았으나 도착하고보니 총장이 그에게 심리학과를 맡아달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심리학 경험이 없던 그는 이에 따라 미국 전역을 다니며 칼 로저스(Carl Rogers)와 에릭 에릭슨에게 심리학(Erik Erikson)을 배우고, 따뜻한 교제를 나누었으나

Karl Rogers
Person-Centered Approach,
인본주의&윤리적 심리학

Erik Erikson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

그들의 접근 방식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영어에 능통했던 반캄은 당시 영어로 충분히 번역되지 않았던 현상학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이해 받는다는 경험”에 대한 탐색을 통해 현상학을 적용하였고, 이것으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KAAM, A. L. (1959). Phenomenal analysis: Exemplified by a study of the experience of” really feeling understood”. Journal of Individual Psychology15(1), 66.
이 논문은 데이터베이스 “https://www.proquest.com/”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연구로 인하여 반캄은 현상학을 심리학에 명시적으로 연결시켜 발전시키기 시작한 첫번째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문헌에서 후설의 이름은 단 한 차례만 거명되고 있다고 하네요.

Amedeo Giorgi (지오르지)

Amedeo Giorgi

여전히 현역 교수로 샌프란시스코의 세이브룩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지오르지는 포드햄 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맨해튼 칼리지와 듀케인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원래 양적 연구방법을 토대로 하는 정신물리학의 전문가였으나,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는 주류 심리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대안적 방식으로 철학적 현상학을 채택하였고 현상학적 심리학의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반캄과 함께 심리학의 “듀케인 학파”를 창립하였으며, 한편 그는 반캄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후설의 현상학을 언급하고 그 근본정신을 살려나간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전히 심리학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의 가치를 입증하는 논문을 계속해서 작성하고 있으며 칼 로저스(Karl Rogers)와 프리츠 펄스(Friedrich (Frederick) Salomon Perls, 게슈탈트 요법)와 같은 저명한 선구자들과 함께 인본주의 심리학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Paul Francis Colaizzi (콜레지)

지오르지의 제자인 콜레지는 듀케인 대학에서 심리학&철학의 학사&석사, 현상학적 심리학에 대한 박사를 받았으며, 이러한 연구를 종합해서 1973년에는 “심리학에서의 반성과 연구: 배움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라는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Colaizzi의 “Reflection and research in psychology”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대출 가능합니다.

이 저서는 반캄의 방법이 지닌 한계를 보완하여 배움이라는 현상에 대한 경험적 심리학적 연구 수행 결과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절차가 다소 복잡하여 이 연구보다는 197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의 방법이 주요 수용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Colaizzi, P. F. (1978). Psychological research as the phenomenologist views it. – 그런데 원문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는 못찾았습니다). 콜레지 선생님은 2010년에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네요.

정리

미국에서 심리학적 현상학이 붐을 일으켰고, 이것이 간호학에까지 흘러올 수 있었던 것(참고: 간호학이 현상학을 만났을 때)은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다국어에 능통했던 반캄 신부가 듀케인 대학교로 오게 된 것이 중요한 계기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겠습니다.

펜실베니아에는 듀케인 대학교가 있습니다.

Reference

Adrian van Kaam – Wikipedia

DanielBurstonPh.D. (2008) Adrian van Kaam, (1920–2007), , 36:1, 90-91,
DOI: 10.1080/08873260701829225

Amedeo Giorgi, PhD – University Professors Press

이남인(2005), 현상학과 질적연구,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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