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프레스 홈페이지 개설 이유와 초보의 소회

2024년 1월에 워드프레스를 개설했다.  이젠 풀옵션 오피스텔에 세들어 살지 않고, 나만의 전원 주택에 살고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티스토리에 나름 정착해서 남들 다 한다는 애드센스 승인도 받아보고, 간간히 글을 올리고 있었는데, 애드센스 승인을 받긴 했지만 광고가 뜨는게 맘에 안들어서 광고를 다 지웠는데도 광고가 뜨더라. 알고보니 카카오에서 자체 광고를 삽입한다더라. 내 오피스텔에 내 허락 없이 오피스텔 건물주가 들어와 산다는 것 같았다. 맘에 안들었다.

그래서 땅 소유주에게 세는 내더라고, 집의 권리만큼은 오롯이 내걸로 하고싶어서 워드프레스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렇게 땅도 빌리고 등기도 치고..

했는데..

계속 풀옵션 오피스텔에만 살아본 사람이 전원주택에서 산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가끔 집에 들어올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

“아니 또 이건 무슨 일이야.. “

별 희안한 일들이 다 벌여져 있다. 잡초도 무성해지고, 갑자기 전원도 나가버리고.. 아 진짜 미춰..

급하게 처리한다고 구글 네이버를 찾아가며 해결을 해도, 한참 뒤에 다시 들어와서 보면 내가 해결했던 그 방법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고 있거나,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도 기억을 못하고 있다..

이래서 집사가 필요한건가 싶다. 관리 하기 어려우면 풀옵션 오피스텔에 사는게 어쩌면 정답이겠다.

그래도 전원 주택이 주는 자유가 있으니, 일단은 여기서 잘 적응해보고 싶다.

그 대신 아무래도 내가 마주한 당황스러웠던 사태와 해결 방식은 좀 기록을 해두는게 낫겠다 싶어서 워드프레스 카테고리를 하나 더 만들어두었다.

나만의 전원주택은 과연.. 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시작

새롭다.
나의 마음이 새롭고 나 자신이 새롭다.
그리고 새로 찾아온 이 사랑이 새롭다.
성동이를 이렇게 새로 알게 된 것도 놀랍지만, 가장 놀라운 건 나 자신이다.
성동이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 너무 새롭다.
그 친구를 나의 이름으로 구속하지 않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그리하리라라는 다짐이 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동이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그리고 그만큼 나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요하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시 상황을 돌이키실줄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하지 않게 하리라.
김성동.
그 친구가 내게 이렇게 다가올 줄 몰랐다.
정말 내 눈에 무엇에 씌여있었던 듯이, 마치 지금은 그 베일을 걷어버린듯이 성동이가 보인다.
나의 직감이 말하고 있다.
얘다.
뭐라고 한줄로 표현할 수 없다.
일일히 나열하기엔 너무 많다.
모든 것을 종합하였을 때 알수 있다. 확신이 든다.
이 친구라고..
중요한 것은 앞으로일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하게 사용하시도록, 이제 우리 둘이 함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함께 십자가를 져야겠다.
둘이 하나가 됨으로 인해 더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2009.09.07.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하나님의 은혜 (feat. 아둘람 트리오 @높은뜻 파주교회)

  • 아둘람: ‘은신처’, ‘피난처’ 라는 뜻. + 아, 둘남: 아(이)를 둘 났다는 뜻.

남편이 본인 이름만 주보에 올라가는게 싫다며, 세 명의 이름을 가지고 별 희한한 조합을 해보다가 급 내려진 센스로 작명을 했다.

확실히 첼로가 함께 해주니 너무 좋았다.

우리의 리허설 찬양 영상.

후설. 논리연구. 1절. 규범적 분과 특히 실천적 분과로서의 논리학.

후설 당시, 논리학을 둘러싼 당대의 주요 경향은 다음과 같았다 (박승억).

  1. 논리학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 (심리학 주의)
  2. 논리학을 형식 학문으로만 보려는 경향
  3. 논리학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

이러한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서 후설이 정리한 쟁점의 시작은 “논리학은 이론적인 분과인가, 실천적인 분과(기술론)인가?” 였다.

이에 따라 후설은 제 1절에서 규범적 분과 특히 실천적 분과로서의 논리학이라는 주제로 논지를 전개한다.

4. 개별 학문들이 이론적으로 불완전한 점

모든 개별 학문들은 이론적으로 불완전하다. 그 까닭은 각각의 학문들이 지금까지 발전되고 확장되어오긴 하였으나, 그 학문적 작업 행위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통찰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학문 가운데 가장 진보한 “수학” 조차도 고대 기하학의 기초 및 허수 둥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볼 때 그 학문의 궁극적 근거가 분명하다고 할 수 없다.

학문은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발전하였고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힘을 얻게 되었으나, 그 학문의 근거를 찾아들어가보면 이론적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5. 형이상학과 학문이론을 통해 개별학문들을 이론적으로 보충하는 것

이러한 학문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통찰을 위해서는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부류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껏 크게 관심이 없어왔으나, 적어도 형이상학은 실재적 현실과 관련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전제를 확정하고 검증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형이상학적 기초는 실재적 현실을 다루는 학문에는 관련이 될 수 있으나, 실재적 현실로부터 독립적인 순수 이념적 규정을 지닌 순수 수학적 학문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모든 학문에 동일한 방식으로 관계하는 “학문 일반을 학문으로 만드는”, 즉 “학문에 대한 학문”, “학문이론“이 필요하다.

6. 학문이론으로서의 논리학의 가능성과 그 정당화

그렇다면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은 수많은 개인이, 알고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적으로 준비된 것들의 총체이다. 학문은 인간에게 앎을 가능하게 하고, 앎의 가능성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은 앎에서 진리를 얻게 된다. 따라서 이 앎을 위해서는 명증성, 즉 우리가 인정한 것이 존재하고, 거부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쾌한 확실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명증성은 진리 자체를 직접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진리에 대한 이런 절대적 인식이 없다. 그대신 우리는 다소간의 높은 사태의 개연성에 대한 명증성을 사용할 뿐이다. 즉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비교적 명증하고, 비교적 높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학문적 인식은 명증성이 도달하는 그만큼 까지 앎이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앎의 모든 것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수가 동일한 것을 경험하며 “앎”을 갖게 한다고 하여 그것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학문은 이론적 의미에서의 체계적 연관을 요구하며, 이 연관에는 앎을 정초하는 것과, 그 정초에 필요한 질서를 세우는 것을 포함한다. 그 결과 학문은 가능한 한 완벽하게 최고의 이론적 목적에 상응하는 정도와 형식으로 앎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체계적인 방법적 절차가 있을 때 앎이 학문이 되며 이에 따라 명증성이 생긴다.

한편, 그러다 보면 학문이 특정 사태를 본연의 방법적인 방식으로만 처리할 때 은폐되어 남아있는 진리나 개연성이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보조적인 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즉, 학문이론, 즉 논리학이 필요하게 된다.

개별 학문들은 무수한 통찰과 경험이 축적된 이 방법적 보조수단을 사용함으로써, 그 학문의 처리방식을 검토하며 규범과 규칙을 수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7. 계속. 정초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징 (독해가 안되는 꼭지..)

첫째, 정초는 그 내용과 관련해 확고한 구조를 가진다.

둘째, 우리는 정초를 즉시 알아차리며, 정초를 단번에 정당화하게끔 허용하는 일반적 법칙과 일정한 관계에 있다.

셋째, 정초의 형식은 인식의 영역에 있으며, 객체에 대한 정초가 변경되지는 않으나 학문의 영역에 따라 날카롭게 구분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정초의 형식은 존재한다. 인식의 영역은 제한되지만 모든 종류의 추론은 일반화되고, ‘순수하게 포착되어야 한다.

8.이러한 특징과 학문 및 학문이론의 가능성의 관계

정초가 없다면 학문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학문은 인식에서 인식으로 진보가 되며, 이미 실현된 정초에서 새로운 정초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초가 없다면, 앞서 주어진 명제를 증명하고 탐구하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는 이것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능한 모든 그룹의 명제를 앞서 제시한 명제에 대한 전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 철저히 검사해야 하지 않는가? 여기에서는 가장 영리한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보다 아무것도 더 갖고 있지 않으며, 가장 영리한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보다 도대체 본질적인 것을 더 많이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풍부한 상상, 광범위한 기억, 긴장된 주의력 등은 훌륭한 것이지만, 법칙적 형식으로 정초하고 고안해 내는 오직 사유하는 존재자의 경우에서만 그 지적 의미를 획득한다.

즉, 학문에 있어서는 요소 뿐 아니라 그것을 결합하는 형식이 재생산의 효력을 갖게 되며, 이러한 형식이 학문 고유의 예견하는 직관과 예언의 특성을 가능하게 한다.

개별 학문도 이럴진데, 범위가 넓은 “앎의 영역”에 관한 형식은 어떻겠는가? 우리는 1)모든 학문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학문이론과 2)개별과학의 이론과 방법에 관계하며 이를 보충하는 특별한 연구가 필요하다.

9.학문의 방법적 처리방식. 일부는 정초, 일부는 정초를 위한 보조작업.

정초를 위한 보조작업: 정초를 위해서는 명백한 기호를 써서 적절한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특히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데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호체계이므로 학자(사상가)는 기술적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언어를 선택하고, 전문용어를 잘 정의해야 한다.

정초: 방법적인 처리방식은(계산처리, 별의 위치, 전기의 저항 등등) 정초의 연관을 통해 선정되며, 이 정초의 연관은 방법적인 절차가 맹목적으로 실행되더라도 객관적으로 타당함을 드러낸다.

10. 학문이론의 문제로서 이론과 학문의 이념

개별적 정초는 학문을 형성하지 않는다. 학문은 정초연관이 통일될 때 가능하며, 이러한 통일의 형식은 모든 학문이 추구해 노력하는 최고의 인식 목표를 달성하는데 사용된다.

결국, 학문이론은 이러저러한 성질의 체계적 통일체로서 학문을 다루게 된다. 이는 통일체를 형식에 따라 학문으로 성격 짓는 것, 이들 상호 간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 이들의 내적 분류를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본성이나 형식의 영역으로, 즉 상대적으로 완결된 이론으로 결정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에 따라 학문이론은 1)학문 속에 등장하는 앎의 방법을 다루는 과제 뿐만 아니라, 2)그 자체를 학문이라 부르는 것을 다루는 과제를 갖는다. 학문이론은 타당한 정초를 부당한 것으로부터 구별하고, 타당한 이론을 부당한 이론으로부터 구별한다.

11. 규범적 분과로서, 기술학으로서 논리학 또는 학문이론

결국, 이에 따르면 학문이론(논리학)은 규범적 분과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일정한 목표를 향하고 있으며 그 목표에 적합하게 판단되어야 하고, ‘학문의 참됨’과 ‘방법의 참됨’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의 적합성에 달려있다. 이 때 근본 규범이 목적이 된다면, 규범적 분과에서 기술학이 나오게 된다. 즉, 타당한 방법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에 대한 탐구, 진리를 찾는 방법적 규칙, 학문 경계의 설정과 규칙, 학문에서 촉진되는 방법을 고안하거나 적용하는 규칙 등을 세우면 학문 이론은 학문의 기술학이 된다.

12. 이와 관련된 논리학의 정의

논리학이 이와같이 기술학이라는 것과 관련된 정의는 다양하게 이루어져왔지만, 아직 더 상세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

논리학을 학문적 인식의 기술학이라고 정의한 슐라이어마허 조차도 그의 정의에서 논리학의 목적이 “학문적 인식”임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고, 논리학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제시한 볼차노조차도 논리학을 학문적 교과서의 기술에 대한 보조수단 정도로만 제시하고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절 감상평

그러니까..요약해보면, 학문은 정초에 정초에 정초를 거듭하며 구축이 되어가는 체계적 지식체이다. 이러한 학문 자체를 다루는 이론을 학문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앎의 방법을 다루는 것 뿐 아니라, 그 정초의 타당성도 분별해야 하는 과제를 갖는다. 즉 학문이론(논리학)은 규범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규칙 등을 세운다는 차원에서 기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렵다. 어렵다. 나의 낮은 문해력에 도전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몇번이나 내가 지금 이걸 왜 읽고 있나 되돌아보게 된다. 두뇌 트레이닝의 과정…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코멘트 부탁드립니다..꾸벅..

임상전담간호사와 전문간호사

임상전담간호사라는 존재(국내에서는 일명 PA로 불리는 존재)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음지에서 일하다 조금씩 스멀스멀 드러나더니 이번에 시범 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완전히 양지로 드러났다.

그동안 뜨거운 감자 같아서 여기서도 저기서도 얼버무리고 있던 임상전담간호사가 이제 한국 의료계를 안정화 시키는 Key로 작용을 할지, 아니면 현재의 이슈가 안정화 되면 다시 그냥 뜨거운 감자 신세가 될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나는 비교적 초창기에 임상전담간호사의 역할을 약 4년간 했다. 당시 비뇨의학과는 전공의 미달로 인해 어려운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고, 나는 적성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던 수술실을 나오는 것이 급했던지라 새로운 인력에게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결정도 못한 채 급하게 공고부터 낸 과로 겁 없이 이동을 했다.

막상 가봤더니, 전공의 1년 차 TO가 총 6명이었는데 그 중 1명만 일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2년 차는 2명이었나..? 요즘은 상상이 안되지만 그 때는 그렇게 비뇨기과가 인기가 없었다.

한참 임상전담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간호 부원장님의 소집이 있었다. 모든 임상전담간호사들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였는데, 그 곳에서 부원장님은 전문간호사 자격이 있는 간호사들이 임상전담간호사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셨다.

일반간호사의 경력 사다리와 전문간호사의 경력 사다리를 별도로 구축하여, 전문간호사를 체계적인 시스템 내에서, 궁극적으로는 합법적으로 관리하고자 하였던 간호 부원장님의 소신과 미래 비전은 확고했고, 따름직 하였다. 하지만 당시 부원장님의 호소력 짙었던 목소리는 메아리에 그쳤다.

청사진을 보여주시기 전, 부원장님은 만반의 준비를 하셨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병원 및 국내 의료계로부터의 상당한 저항이 예상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전문간호사라는 인력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이것은 권한의 허용 및 비용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3년의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는 두 번에 걸친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만 될 수 있는 전문간호사는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었으나 이들을 흡수할 수 있는 체계는 없었고, 병원의 많은 부서에서는 전공의를 대체할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특정한 자격이 없는 간호사들을 무작정 채우기보다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보건복지부로부터 전문간호사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을 그 자리에 채우고, 그들의 역할을 시스템 안에서 인정함으로써 근거를 만들어 미래를 그리고자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선봉장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던 무적 장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앞세워 함께 돌진해 나아갈 군사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당시 간담회에서 부원장님으로부터 그 뜨거운 청사진을 들은 후, 객석에서 나온 질문 중 하나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럼 이미 일반대학원 석사를 한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내가 생각하기엔 이것이 그 때의 한계다.

오늘 전문간호사협회로부터 정책 브리핑 메일링을 받았다.

대 찬성이다. 진료지원 인력을 전문간호사제도로 흡수하는 것.

그런데, 진료지원인력 중 전문간호사 자격이 없는 경우 유예기간(2~3년)을 부여하여 법률적 안전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다라는 대목에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보인다.

첫째로, 임상전담간호사가 특정 기간 내에 시간과 비용을 들여 훈련을 별도로 받아 전문간호사가 되면 개개인 간호사에게 돌아가는 보상이 명확히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리고 많은 간호사들은 지금까지 순수하게 1)자신의 자기 발전, 혹은 2) 환자에게 좀 더 나은 간호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지 만으로 그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전문간호사가 됐다. 하지만 국내에 천 명 이상으로 늘어난 임상전담간호사에게 어떠한 상응하는 보상도 없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일하기 위해 별도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 전문간호사 과정을 이수하라고 한다면.. 과연 통할까 싶다.

둘째로, 만약 전문간호행위에 대한 수가체계나 보상체계가 명확하게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유예기간을 시작하고, 그 기간 내에 현재의 전문간호사과정을 통한 전문간호사 자격을 득할 것을 권고한다면, 그 교육과정을 이수할 비용은 누가 부담해야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결국 주어질 보상도 없는데 시간 뿐 아니라 3000만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서 교육과정을 이수하라고 하면 누가 하겠는가? 적어도 이들을 고용하는 병원에서 장학금이라고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국가에서도 이를 위해 비용적으로도 철저하게 지원 해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로, 법률적 안전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공식적 기회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현재의 전문간호사 교육과정 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현재는 전시상황과 같다. 이럴 때는 무엇보다 신속하게 인력을 준비시켜서 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국내의 전문간호사 과정은 현재 일하고 있는 천여명 이상의 임상전담간호사를 2-3년 이내에 절대 흡수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 근무하고 있는 임상전담간호사로 한정하여 “신속 교육과정”을 별도로 마련해서, 그 유예기간에만 한정적으로 운용하여 전문간호사 자격 주는 방식을 검토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 전문간호사 교육과정은 수술지원에 대한 교육은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 수술실 PA에 대한 교육과정에 대한 개발이 매우 시급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현재의 전문간호사의 분과를 어떻게 체계적이면서 간략하게 통합할지에 대한 대안을 마련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또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제시해야 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때에.

전문간호사들이 합법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 내에서 그 전문간호를 제공하게 될 날이 내일이 될지, 10년 후가 될지.. 가늠이 안되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오리라 믿는다.

갑자기인것 같지만 전혀 갑자기가 아니었던 그 장벽 같이 갑자기.

후설. 논리연구. 들어가는 말(연구의 필요성)

1. 논리학에 대한 정의와 그 학설의 본질적 내용에 관한 논쟁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정의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건 밀(J.S.Mill)이 흄의 연상심리학에 영향을 받아 귀납법적 논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이래 논리학에서 “심리학적 경향”이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의 “형식적 경향”, “형이상학적 경향”또한 계속 전파되며, 논리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2. 원리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갱신할 필요성

여러 사상가들이 논리학을 확실한 길로 이끌려고 하였으나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추구한 “목표”가 불분명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학문의 “목표”는 그 학문의 “정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정의는 학문의 경계를 명백하게 포함해야 한다.불명확한 경계로 인하여 전혀 다른 분야가 혼합 되는 것은 위험하다.

이에 따라 저자는 본 연구를 통해 현대의 심리학에 기초한 논리학이 이러한 위험에 놓여있음과, 이로인하여 논리적 인식의 진보가 억제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3.쟁점. 선택해 나아갈 길

현재 논의의 진영은 다음의 두 입장으로 정리된다.

  1. 논리학은 심리학에 독립적인 이론적 분과이며, 동시에 형식적이고 논증적인 분과이다.
  2. 논리학은 심리학에 종속적인 “기술학”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개 사이의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논리학의 본질적 목적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하여

  1.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2번 입장의 의미와 정당성을 확인하고,
  2. 모든 기술학의 중요한 기초를 형성하고, 순수한 논증적 학문의 특성을 지닌 이론적 학문을 선별해낼 것이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이런 마음.. 다시 말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하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전 저의 삶을 부족함 없이 풍요롭다 생각해왔고, 순간순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감사해왔었습니다.
분명히 행복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행복”이라는 단어는 쉽게 나오는 단어는 아닌가 봅니다.
지금 제가 “행복하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사랑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주님.. 아시죠..?
사랑이신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랑되게 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9년 ,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시간? 돈? 흘러넘치는 감정?
아니면.. 다 필요없이.. 오직 존재 그 자체..?

저는 사랑이라는게 마음만 있으면 되는.. 뭔가 초월적이고 거룩한 어떤 무엇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사랑이라는게.. 마음이 물론 가장 중요하긴하지만 마음만 있다고 되는것 아닌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걸 곰곰히 생각해보면요
어떤 사랑이든 특별한 기적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줘도 더 주고싶은 마음.
그런데.. 정말 생각해보면 할수록 이런 마음은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받는게 훨씬 더 좋은데 아니!! 뭘 계속 주고싶다고????!!!!

그런데 이런게 사랑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이가 행복할 수 있도록 뭔가 계속 주고싶고..
그리고 주지못해 마음아파하는..
이런 현실세계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감정이 바로 사랑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곤란한 것은…
주고 싶은데..정말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찐하게 사랑하고 싶은데.. 어떻게 사랑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하나님.
저는 무엇을 줄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사랑을 줄수 있을까요?
정말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것 같은데..주님께서 분명히 제게만 맡기신 무언가가 있을테니까 분명히 저도 무언가 줄 수 있겠죠??
그게 뭔가요? 어떻게 줄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랑하기 위하여..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내게 특별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지를 알아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제게 사랑의 마음을 조금씩 부어주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사랑하고싶다는 마음을 허락하심에 감사합니다.
이젠 저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를 알게 해주세요.
저의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그 무엇을 주기 위해 지금의 저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알게 해주세요.
지금 저는 경제력이 하나도 없어서 어려워하는 이웃도 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떤 기술도 없어서 직접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는 센스도 부족해서 위로해주는 방법도 잘 몰라요.
주님..그래도 분명히 제게 특별히 허락된 무언가가 있겠죠?? 사랑하라고 주신 무언가가 있겠죠??
그것을 발견하고싶습니다. 보여주세요.
주님. 사랑하기 위하여 오늘도 사랑하며 준비할수 있게 해주세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9년 ,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마음이 두근거릴 때의 기다림.

매일 똑같은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도 가끔씩 정말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마음이 두근거리세요??

[위대한 자기발견 강점혁명]이라는 정말 신선하고 괜찮은 책이 있답니다.

오늘날의 많은 자기계발서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극복하라’는 식으로 접근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약점만을 생각하게 하고 답답해지게 하는데요, 이 책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자기계발에 접근한답니다. 바로, 약점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의 강점에 집중하라는 것이지요. 30여가지의 강점 리스트 중에서 자신의 5가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제 안의 강점을 생각하게 되고 엔돌핀이 마구마구 솟아오르는것 같아요^^

이 책을 읽어보니 저의 강점은 [성취, 미래지향, 신념, 최상주의, 책임]에 있다고 합니다.

성취할 것이 있을 때,
미래를 꿈 꿀때,
그리고 뭔가 책임을 져야 할 때 제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는 것이 신념과 일치할 때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뭔가를 하기로 했다면 이왕 하는 거 최상의 것을 추구한답니다.

음.. 솔직히..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들이었습니다.
이런 성품때문에 그런가..?

저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거리를 만났을 때 마음이 두근거린답니다.
뭔가 성취하고 싶은게 생겼을 때, 그리고 그것이 나의 신념과 비전과 일치하는 것 같을 때..제 가슴은 정말 터질듯이 두근거린답니다…

달성할 목표가 생겼다는 것만큼 저를 달리게 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뭔가 달성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Start line에 서서 Ready와 Set이 없이 Go 해버릴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Ready와 Set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터질것 같은 두근거림을 좀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저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볼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가끔씩..

아직 뒤에 계시는 것만 같은 예수님이 느껴진답니다

.
“벌써 갔구나..”
앗. 그때서야 다시 깨닫죠.
‘주님..제가 또 앞섰군요..’
계속 달리면서도 심경이 교차합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빨리 오셔서 같이 달려주시면 안될까요?? 그러실거죠??’
또는
‘지금이라도 멈추고 돌아갈까요??’
때로는 예수님께서 “그래그래”라며 흐뭇한 표정으로 같이 달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님께서 완강하게 아무말씀 없으시며 그 자리에 곧게 서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참.. 막막해지죠..ㅠㅠ

성격 탓에 이런 순간들을 자주 겪어가며 제 안에 새롭게 강해지는 마음이 하나 있답니다.
아무리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빨리 달려가고 싶더라도..
아무리 우리안에 소망을 주시는 분이 우리 성령님이라는 말씀이 있다하더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강한 Yes가 있을 때까지는 잠깐 멈춰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빨리 달려가고 싶어서 Start line에서 준비도 없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 또는 “자기 기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애를 할 때도.. 두근거린다고 바로 달려가지 말고 잠깐 멈추고..
진로을 결정할 때도.. 두근거린다고 바로 달려가지 말고 잠깐 멈추고..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도.. 두근거린다고 바로 달려가지 말고 잠깐 멈추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정말 생각해보니 그랬던 순간에는 늘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주셨었습니다..

마음이 두근거릴 때의 기다림..
네 하나님. 그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이 두근거리더라도 잠깐 기다리겠습니다.
콩닥콩닥 뛰는 기분좋게 뛰는 이 심장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리고 하나님 당신의 심장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까지 멈춰 서 있겠습니다.
제가 먼저 달려가지 않겠습니다. 뒤에서 절 바라보게 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이 두근거리더라도 예수님께서 같이 가자 하실 때까지는 멈춰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009년 ,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예를 좇는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감투를 쓰고
더 넓은 세상을 섬긴다는 명목을 앞세워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매일을 투쟁하는 삶이 아니다.
날 진정 자유롭게 하는 것은..
날 진정 평안하게 하는 것은..
매일같이 나의 성취욕을 자극하는 많은 기회의 도전들 앞에서
“예수님이셨으면 어떠셨을까”를 잠시 묵상한후
과감히, 예수님이 가셨던 길, 그 한 길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자유다.
그것이 나의 평안이다.

하나님.
다시 여기까지 돌아오는데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줄 알았고, 저는 하나님 앞에서 순종적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스스로 저를 높이려고 해왔었습니다.
다를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 나의 주님..
예수님이 그리하셨듯이.. 한 영혼을 바라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호령하려하지 않으셨음을 묵상하며 저의 한없는 명예욕을 꺾겠습니다.
제 안에서 절 변화시켜주옵소서.
결단하고 비오니 들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9년 ,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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