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우리 대화 좀 나눠볼까요??

혹시 이런 경험 있으세요??

친구를 만났는데, 얘가 말할틈도 주지 않고 계속 내리 얘기를 하는거에요. 이얘기 저얘기 계속 혼자 떠들다가 좀 조용해졌길래 이제 내가 말할 차례가 됐나보다 했더니 이제 가잡니다. 그 친구와 헤어진 후 남은 건 아쉬움 뿐… 진짜 만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거죠. 얘가 도대체 날 왜 만나자 했나 싶고..
만약에 이것도 가끔가다 한번 그러면 얘가 할말이 많았나보다 하고 이해하고 즐겁게 들어줄 수 있겠지만, 만날때마다 이러면.. 정말.. 이 우정이 의심스러워지죠..

그런데 정작 제가 그런 배려없는 수다쟁이였음을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말이에요!!

그때 반성 많이하고 그 뒤로 하나님과 대화다운 대화를 해보려고 많이 노력해왔습니다.

“하나님, 우리 대화 좀 나눠볼까요??”라면서 말이에요^^

여느 친구관계처럼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에도 어느정도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노력한 만큼 확실히 하나님과 더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어요.

기도는 대화이고, 대화는 주고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고받음으로 서로를 더 잘 알게되고 더 사랑하게 되죠. 하나님과 대화를 주고받으면 그분을 더 잘 알게될거라는 생각만 해도 정말 흥분되지 않으세요?? 꺄앗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는!! 앞서 말한 것 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by 로렌커닝헴(YWAM)

만약 당신이 주님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
당신을 처음 이끈 내적인 인도하심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의논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의 기본적 권리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1.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
    만약 당신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만약 당신이 겸손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3가지 단계.
    그의 주되심에 복종하라. 당신 마음에 가득한 당신 자신의 생각, 희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 포기할 수 있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라. 당신이 웬만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가장 좋은 생각을 갖고 계신 그분의 생각을 듣도록 하라.
    사탄을 대적하라. 이 순간에 사탄이 당신을 속이려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목소리를 잠잠케 하기 위해 당신에게 주신 그 권위를 사용하라.
    응답을 기대하라. 당신 생각 속에 있는 그 질문을 한 후에 그분이 대답하시도록 기다리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말씀해주시기를 기대하라. 그분이 말씀하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허락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는 인도하심의 방법에 대해 지시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당신은 그의 종일 뿐이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으라. 순종과 듣는 것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을 선택하실 것이다. 그의 ‘말씀’을 통해서 – 이것은 당신의 매일 성경 읽기 시간을 통해 올 수 있다 – 하실 수도 있으며, 아니면 특정한 성경 구절을 지시하실 것이다. 들을 수 있는 음성을 통해서든지, 꿈을 통해서, 그리고 환상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그러나 가장 흔히 있는 방법은 조용하게 내적으로 들려오는 음성을 통한 것이다.
  3. 용서받지 못한 어떤 죄든지 있다면 고백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면 깨끗한 마음은 필수적이다.
  4. 당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 듯하면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가장 마지막으로 들었다고 확신하는 그곳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순종하라. 열쇠가 되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한 마지막 일에 당신은 순종하였는가?’ 이다.
  5. 당신 자신이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사용하여 당신의 방향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어야 한다.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6.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는 다른 이에게 당신이 인도하심 받은 것을 말하지 말라. 때때로 이 일은 즉시로 일어난다. 그러나 또 기다려야 하는 때도 있다. 기다리는 주요 목적은 인도하심을 받는데 따르는 4가지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교만 :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당신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추측 : 내가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이야기 하므로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놓치기 쉽다.
    다른 사람에게 혼란을 가져다 준다. 그들도 역시 준비된 마음이 필요하다.
  7. 하나님께서 때때로 둘이나 그 이상의 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확인시키실 것이다.
  8. 속임수에 대해 조심하라. 위조지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종이 봉지를 위조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위조할 가치가 있는 것만 위조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모조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점괘, 강신술, 운수, 점성학 등을 통해 가짜 인도하심을 나타낼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당신을 예수님께로 가까이 이끌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실 것이다. 사탄의 인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당신을 멀어지게 하고, 당신을 속박 할 것이다.
    진정한 인도하심인가를 시험해보는 한 가지는 당신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인도하심이 성경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도록 인도하시지 않는다.
  9. 사람의 반대는 때때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인도하심이 될 수 있다.
  10.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자세히 들을수록 당신은 당신의 부르심에 더욱 효과적이 될 것이다.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배우는 심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올바른 사람과 함께, 올바른 일의 연결 안에서, 올바른 지도력하에, 올바른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올바른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옳은 일을 옳은 장소에서 행하고 말하는 것이다.
  11.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수록 더욱 쉬워질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전화를 받자마자 가장 가까운 친구의 음성을 알아내는 것과 같다. 당신이 그의 음성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의 음성을 아는 것이다.
  12. 주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실 뿐 아니라 인격적이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도하심은 달린이 지적한 대로 인도하시는 분에게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릴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욱 잘 알아 가게 될 것이다.

<

p style=”text-align: right;”>(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6장.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문)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현상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한편으로 현상학은 본질주의의 한 형태로 특징지어진다. 단지 상이한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 설명이나 사실적 설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은 의식의 흐름, 체화, 지각 등의 불변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와 인간 실존을 탐구하기 위한 출발점은 현사실적 존재로 남아있다. 현상학은 단순히 본질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라 현사실성의 철학이기도 하다.
  2. 현상학은 초월철학의 한 형태다. 그것은 경험과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반성을 추구하며,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그 가정들(특히 마음-독립적 세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가정)을 유보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상학은 반성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며, 철학의 핵심 임무는 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3. 현상학은 엄밀하게 ‘학’으로서의 철학을 확립하고자 하지만, 또한 우리의 생활세계를 설명하고 공간과 시간, 세계에 대한 선과학적 경험을 정의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4. 현상학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분야로 자주 기술된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그 자체로 주어진 것으로 기술한다. 현상학은 경험의 신경생리학적 기원 또는 생물학적 기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인과적 설명을 제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후설 자신도 발생적 현상학, 즉 지향적 구조의 기원과 발전, 역사성을 분석하는 현상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1. 본질과 경험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하지만 생활세계에 곤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다.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고, 그 방법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으나, 메를로-퐁티의 주장대로 우리는 우리의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 또한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주체성과 상호주관성

현상학에서의 “주체성”은 감추어진 내면성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여는 것으로, 나는 단순히 나에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에 대해서도 존재하며, 나에 대한 이해는 나만의 이해가 아니라 타자들의 이해를 포함함을 인정한다. 세계는 주체성과 상호주관성과 분리 불가능 하며, 현상학의 과제는 세계, 주체성, 상호주관성을 그 고유한 연결 가운데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3. 당연하지 않은 세계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명백하기에 보통 그것에 대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상학은 이렇게 무시된 명백함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멋진 세계를 이해하고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을 중단할 필요가 있다.

4. 사실적 경험의 풍부함을 포착하는 것

현상학적 탐구는 사실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이행해나가지만 본질을 찾는 것이 분석의 목적이 아니다. 본질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사실적인 것의 풍부함을 포착하기 위함이지, 현사실성을 추상화하고 무시하려는 욕망 때문이 아니다.

5.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

메를로 퐁티는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세계 속의 유한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세계에 몰입된 삶을 단번에 단절할 수 있는 절대적 반성을 수행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환원을 실행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6. 현상학은 진행중

현상학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항상 진행중이라는 사실은 고쳐져야 할 결함이나 단점이 아니라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다. 현상학은 견고하고 융통성 없는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대한 경이이자 끊임없는 운동이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 (김동규 옮김)”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현상학의 발전: 정적&발생적, 후설&하이데거&메를로 퐁티 & 표층&심층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5장)

후설의 현상학만 해도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에 상당한 진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전적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1.정적&발생적

후설의 초기 저작의 현상학은 정적 현상학(static phenomenology)으로 이 때는 탐구 대상이 모두 발생이나 역사성이 아닌 지향적 상관관계였다. 그러나 후설은 지향성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는 속성을 깨닫게 되고, 지향성의 시간적 생성을 검토하는 발생적 현상학(genetic phenomenology)를 수행하였다. 이 때, 발생적 현상학의 범위는 개별적 자아의 경험적 삶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른바 세대간 현상학(generative phenomenology)를 모험적으로 시도하며 전통과 역사의 구성적 역할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2. 후설&하이데거&메를로-퐁티

현상학의 발전을 추적할 때는 체화, 시간성, 그리고 사회성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설은 신체가 본질상 대상들에 관한 지각과 상호작용에 관여한다고 주장했으며, 초기부터 시간성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아서 이 차원을 무시한 지향성에 대한 탐구는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설은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상호주관성 개념을 채택하고 논의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후설은 후기 논의의 초월적 분석에서 체화와 역사성, 상호주관성의 주제를 아우르며 포함하였고, 이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가 추구했던 것과 같다.

특히 하이데거는 생활세계를 주위세계, 더불어있는 세계, 그리고 자기-세계라는 세 영역에 대한 해석으로 기술하고, 현존재를 언제나 타자들과 함께 있는 존재임을 밝혔다. 그리고 메를로-퐁티는 주체성을 타자성을 향한 개방성 및 외재화의 운동이자 지각적 자기-초월임을 밝히며 상호주관적 삶과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한편, 메를로-퐁티는 후설보다 체화와 현사실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하이데거는 후설보다 전통이 우리 생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강조하며 현상학을 전개하였다.

3. 표층 현상학 & 심층 현상학

표층 현상학은 특정한 대상 유형과 특정한 지향 작용사이의 상관관계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지만, 심층 현상학은 지향적 능동성이 심층-차원에서 어떤 수동성의 과정에 의해 정초되고 조건지어지는지 등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후설에 따르면 주어진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념을 형성하는 우리 인간이 이렇게 심층에서 수동적이고 익명적으로 기능하는 차원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대상을 향한 각각의 지향성이 고유한 다양한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근본적인 현상학적 차원을 특성화하고 분석하려는 시도가 바로 심층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구체적인 과제가 우선 대개 보이지 않게 감춰진 채로 있는 것을 열어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미셸 앙리는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이라 불리는 것을 발전시키려 했다.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현상학자들은 현상학이 대상을 향한 지향성 및 대상-현시의 고정성과 점유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4. 나의 성찰

일단 후설이 제1대짱이시구만.

이쯤되니 철학하시는 분들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뿐이다.

인간의 사유란 무엇인가.. 나의 단세포가 좀 부끄러워져서 안되겠다. 세포분열을 좀 시키고 싶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눈에 띄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전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약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눈에 띄더라도 좀 나중에 눈에 띄고 싶습니다.
인정 받더라도 좀 나중에 인정 받고 싶습니다.

교회를 다닌지.. 이제 10년이 좀 넘었군요. 오홋!! 강산이 한번 바뀌었겠습니닷!! ^^

음.. 교회를 다닌지 10년..
놀랍게도 이 10년 가운데, 나서서 얼굴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은 것은..딱 2년입니다. 그것도 가장 처음 1년과 가장 최근 1년. 그리고 중간기간 8년은 항상 뭔가 나서서 했습니다. 나서서 뭘 하는 걸 정말 좋아했습니다.

ㅋㅋ어렸을 때부터 제 얼굴에는 뭔가 두꺼운 철판이 하나 깔려 있었던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반장선거할 때 하고싶다고 손드는 애가 저였으니까요..

ㅋㅋ 이런걸 똥베짱이라고 하나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임원선거 때면 손들어서 임원되고..ㅋㅋ 찬양단, 성가대, 교사 등등, 눈에 드러나는 건 왠만큼 다 해본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칭찬과 인정도 받았었죠..생각해보면 열심히 교회활동했던 8년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먹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1여년 전부터 어떤 것도 하지 않게 하시더라구요. 가만히 잠잠히 회중으로서의 자리를 지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음.. 솔직히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좀 쉬고싶기도 했었기에, 하나님의 이러한 환경으로의 인도하심은 아주 Welcome이었습니닷!!

음.. 눈에 드러나는 것, 임원이나 찬양단, 교사는 현재 하고있지 않지만, 그대신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의 마음을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현재는 중보기도의 자리만 조용히 지키고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이 자리라도 지키지 않았더라면, 저..성격상 정말 피폐해졌을 것 같습니다..ㅋㅋ

어쨌든, 그럼 저의 10년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정리가 될까요??

처음 1년은 적응기, 그리고 8년간의 눈에 띄는 신앙생활, 그 뒤의 1년간의 조용한 신앙생활..
그런데 말이죠. 제게 있어서는 이 1년간의 조용한 신앙생활이 결코 수줍은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강력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가 눈에 드러났을 때를 회상하며 말이죠.

음.. 예를 들어..찬양단!!
전 제 신앙생활 10년 가운데 8년동안 찬양단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때로는 피아노로, 때로는 singer로서.
그러나 지금은 잠잠히 회중의 자리에서 찬양합니다.

그런데!!
전 지금이 하나님께 찬양드리기에 훨~~~~~~~~~~씬 더 자유롭답니다!!
지금 찬양할 때 하나님을 훨씬 더 깊게 경험합니다.
훨씬 더 자유롭게 춤을 춥니다.
훨씬 더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히려 지금은, 제 주변에서 다른 지체가 찬양을 하고 있으면, 그 지체의 귀에 제 찬양의 소리가 들어가게 하고싶지 않아 자리를 옮깁니다. 누군가가 제 찬양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제가 제 목소리자체에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찬양할 때 만큼은 다른 사람들과는 떨어진 곳에서 찬양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찬양단도 웬만하면 쳐다보지 않고 눈을 감고 찬양합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은혜가 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 더 집중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 지난 8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죠.

예전엔 늘 앞에 서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늘 항상 나를 지켜볼 누군가를 의식하며 찬양을 했었으니까요.
오히려 쳐다봐주길 원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누구의 시선과 관심도 의식하지 않은 채 찬양을 할 수 있을 때 정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찬양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정말 대단해져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앞에 서서, 회중들을 신경쓰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까?? 그건, 정말 보통 수준 이상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게 만약 다시 찬양단을 하라고 한다면, 전 그저 제 목소리로만 찬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보통 찬양단처럼 회중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찬양하고 싶습니다. 절 쳐다볼 회중들을 의식하며 진심으로 찬양할 자신이 아직 없습니다.

이런거 보면, 전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해야할 시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시선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떼어버리지 못했습니다.

비단 찬양단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다른 사람 시선에 대한 관심이란 것이 끼어든 순간부터 많은 것이 희미해집니다.

이건 정말 너무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에만도 시간이 너무너무 아까운데..

이렇게 블로깅을 할 때도 마찬가지랍니다.
전 그저 하나님께 고백하듯 제 생각을 기록하기로 하고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많은 분들께 읽히는 걸 보며, 제 하나님만을 향했던 그 태도와 마음이 희미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읽힐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 글을 읽으시고 저란 애를 오해하지 말아주세요ㅠㅠ

음.. “얘는 아직 멀었구나.. 아직 어리구나..”라고 생각하신다는 건, 정말 맞는말이니 괜찮습니다. 그저 격려해주세요.

그런데..혹시라도 “얘는 좀 괜찮은 애 같구나. 굉장히 신앙이 깊고 성숙한 것 같아..”라고 생각이 드신다면 그냥 잡생각이었다 하고 던져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환상입니다.

제 블로그는.. 고백의 공간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을 기록하는..굉장히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공간입니다. 전 저보다 하나님이 더 드러나길 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혹시라도 저라는 애가 더 드러나게 될까 겁이 납니다.

눈에 띄더라도 좀 나중에 눈에 띄고 싶습니다.
인정 받더라도 좀 나중에 인정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격려를 감사함으로 받되, 그것으로 저의 교만함을 쌓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더욱더 친밀해진 후에, 그 때 세상속에 우뚝 서고 싶습니다.
아직 저는 잠잠히 시간을 기다리며 움틀 준비를 하고 있는 씨앗이고 싶습니다.

하나님.
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쾌한 향기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직 전 세상에 드러나기엔 너무 연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좀 나중에.. 하나님께서 저를 충분히 연단시키신 후에, 제가 다른 사람의 관심에도 초연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 후에, 그 때 저를 세상가운데 드러내주세요. 그 때 눈에 띄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선한 영향력을 충분히 세상에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서있게 되었으면 좋습니다.
아직 저는 너무 연약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어린 시선으로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저로 하여금 당신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제가 절대절대절대로 드러나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그저 하나님 당신만 드러나기 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절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시고 낮추셔요. 전 당신것입니다. 전 당신의 소유입니다. 당신만 바라보기 원하는 당신의 소유물입니다. 아시죠??

나의 사랑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본질?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4장. 과학과 생활세계)

1. 현상학에서 본질은 무엇인가?

철학자는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본질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단 자하비도 “철학자로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연한 특징과 우연한 속성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설은 생활세계, 지향성, 체화, 시간성 등 근본적인 주제의 불변하는 보편적 구조를 찾고자 헌신하였다.

한편 본질을 찾는 능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에서 문제없이 채택하는 능력이다(우린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이 다 어떤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암묵적올 알고 있으며, 책장 사이에 노트북같이 우연하고 우발적인 것이 껴 들어가 있을 때 쉽게 구분해낼 수 있다). 어떤 대상의 본질적 구조를 찾기 위한 형상적 변경은 일종의 상상의 도움을 받는 개념적 분석이지 누구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이 아니다.

또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통찰은 변형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디지털 책이 책으로 간주되어 책의 개념이 달라졌듯이). 그리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연구되는 대부분의 대상들은 본질적인 모호함으로 특징지어지고,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분류와 기술은 본질상 근사치적이기도 하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대상에 정확성과 정밀성을 본질로 부과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이다.

2. 본질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우리의 탐구는 실제로 주어진 것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우리의 탐구 방법은 특정한 과학적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당면한 주제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후설이 “참된 방법은 탐구되어야 하는 사태들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 같이 말이다. 모든 것은 그 영역에 적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환원주의는 대상을 자연과학적 방법과 원리 중 가장 간단한 것으로 환원시키며, 제거주의 또한 자연과학의 방법과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제거해버린다(의식 또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또한 과학적 자연주의는 방법적으로도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도출된 것 만을 참으로 여긴다. 즉, 과학적 환원주의, 제거주의, 과학적 자연주의등 (낯설지 않은 이런 방식들은) 사회학과 인문학 등의 현상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 가치가 없다고 간주해버린다.

정말 그러한가?

결코 그렇게 볼 순 없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생활 세계가 과학에 의해 망각되고 억압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 조차 생활 세계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메를로 퐁티의 주장대로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연과학만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며, 우리의 경험세계는 그 나름의 타당성과 진리가 있으므로 과학의 승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자연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탐구해나가야 한다.

3. 나의 성찰

내가 다루는 간호 현상은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간호 현상을 숫자로만 측정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간호 현상이 가진 풍부한 색깔을 가리는 일이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본질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은 뭔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본질이라고 하면 일단 딱 떨어져야만 할 것 같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간호 현상의 그 모호한 본질을 찾기 위해 자연과학적 방법 뿐 아니라 현상학적 질적연구라는 도구 또한 장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