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케?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3장. 방법론적 고찰)

현상학자 후설은 세계를 밝히기 위해 의식을 탐구하였고, 의식을 단지 세계 내의 일부로 존재하는 한 대상이라기보다 세계에 대한 주체로 간주하였다.

또한 후설은 세계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야만 하며, 이를 위해 우리 의식은 에포케라고 부르는 것을 수행하는 일, 곧 특수한 괄호치기나 판단중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때 무엇을 괄호치거나 판단 중지해야 하는가? 에포케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의견 불일치가 있어왔고, 단 자하비는 3가지 대표적인 오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에포케에 대한 일반적 해석

오해 1.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 사유의 습관, 편견, 이론적 가정이다. 현상학은 대상을 향한 전회이다!

이 관점에서 현상학은 열린 마음으로 대상들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이때 현상학은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descriptive) 과제이며, 현상의 특이성을 존중하기 위해 가능한 세세하게 기술해야 한다.

나도 이것이 에포케라고 배웠다. 대상에 대한 선입견, 편견, 이론적 가정 등을 내려놓는것. 그런데 아니라고?

단 자하비는 이것이 현상학의 일부 특성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나 현상학적 분석의 범위를 적절하게 포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단 자하비에 따르면 현상학은 대상을 향한 전회만을 포함하지 않는데, 오해1의 관점은 대상과 주체 혹은 세계와 마음의 상호 관계나 상관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체계적 야심을 결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상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되, 그것이 우리 의식에 어떻게 경험 되는지에 대한 관계 또한 놓치면 안될 것 같다 (내 생각).

오해 2.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세계의 대상들과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이고 자연적인 집착이다. 현상학은 주체로의 귀환이다!

이 관점에서 현상학은 우리 내면의 경험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양상을 주제화하고 기술하도록 우리의 관심 범위를 넓힌다.

단 자하비는 이 또한 현상학의 일부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나 현상학적 분석의 범위를 적절하게 포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현상학은 주체로의 귀환만을 포함하지 않으나, 이 관점도 대상과 주체 혹은 세계와 마음의 상호 관계나 상관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체계적 야심을 결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그동안 차마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경험을 포착하고 탐색하더라도 그 차원이 세계와의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가지고 있기에 그래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내 생각).

한편 이런 오해도 있다.

2. 의식과 실재

오해 3. 현상학은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며 존재에 대해서 물을 수 없다.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실제로 현존하는 세계다.

이 관점에서는 현상과 사태가 어떻게 나타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실재로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부적절하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단 자하비는 후설은 세계와 참된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몰두하였으므로 에포케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3.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에포케를 하라는 것인가?

단 자하비는 에포케를 “실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특정한 독단적 태도를 중단시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 때 말하는 실재에 대한 독단적 태도는 우리의 전이론적 삶에도 스며들어 있는 자연적 태도, 즉 우리가 경험에서 마주하는 세계가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를 중단하는 것도 포함한다.

실재가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현존한다는 자동적인 믿음을 유보함으로써 실재는 특정 관점에서 드러나고 주제화되며, 처음으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즉, 에포케와 환원은 실재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기보다는 바로 그 실재를 철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에포케를 통해 실재를 더 이상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대상들이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나타내는 대상과 관련된 지향적 작용과 경험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에포케는 초월적 환원을 위한 첫걸음이자, 적극적인 반성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성적 연관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4. 에포케는 후설만의 주장인가?

단 자하비는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가 에포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으나,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 또한 철학적 사유의 태도에 이르는데 필요한 반성적 운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후설의 에포케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5. 나의 성찰

나에게 에포케는 지향적 존재이자 세계-내-존재인 가 의식적으로 결코 분리하기 어려운 현상(대상)을 면밀하고 객관적으로 밝히 드러내기 위하여 나의 일상적인 의식적 습관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사태를 새롭게 바라보려고 하는 의지적 작업으로 해석된다. 맞을까..? 단 자하비는 분명히 최대한 쉽게 설명한 것 같긴 한데, 쉽지 않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지향성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2장)

1. 지향성 (Intentionality)이란?

현상학을 공부할 때 자주 등장하는 “지향성”.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어떤 의지나 목적이 있다는.. 그런 성질을 말하는 것일까?

네이버 사전에 “지향”을 검색해보니 다음의 3가지 정의가 나온다.

  1. 어떤 목표로 뜻이 쏠리어 향함. 또는 그 방향이나 그쪽으로 쏠리는 의지.
  2. 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 일
  3. 동기가 되는 목적의 관념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예상되는 결과의 관념을 이르는 말.

처음에 생각해봤듯이, 보통 지향이라고 하면 1번의 정의를 생각하기 쉬운 것 같다.

하지만 현상학에서의 “지향성”은 2번의 정의를 의미하며(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 일), 이는 의식의 속성을 말한다 (네이버 사전에 있어서 살짝 감동했다).

의식은 의식 자체와만 연관되거나 의식으로 점유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사실.

2. 현상학과 지향성

그렇다면 현상학에서는 왜 그토록 지향성을 중요하게 다루는가?

그 이유는 이 “지향성”에 대한 연구가 주체와 대상 간의 차이 뿐 아니라, 그 둘의 연결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지향적” 속성은 자기-초월적 성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향적 속성을 가진 마음은 평소 폐쇄된 곳에 갇혀 있다가 어떤 자극에 의해 세계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 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에 관여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세계 내 존재). 또한 우리가 의식하는 ‘대상(세계)‘들은 단순히 의식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게끔 단순히 의식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고, 현시하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대로 현전하도록 구성되어 우리의 의식과 연관된다.

우리는 평소 우리에게 나타내는 대상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기 쉬우나, “지향성”을 주요 관점으로 삼는 현상학은 이러한 사유 작용(cogito)사유 대상(cogitatum)의 상관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즉, 현상학은 주관적 경험 자체에 대한 좁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어떻게 있는 그대로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지닌 의미와 더불어 나타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대상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검토는 대상들의 나타냄의 방식과 상관된 경험의 구조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나타내는 대상들을 탐구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나타나는 대상들에게 있는 자로서 드러낸다.

결국 지향성의 교훈은 마음은 본질상 열려있고, 세계는 본질상 현시 가능하므로 마음과 세계는 동시에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나의 성찰

나는 현상학자가 아니니 의식의 지향성 그 자체에 대해 연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간호 대상자들과 그들의 세계를 다루는 간호 현상을 연구할 때, 이 의식의 지향성은 놓치지 않고 가져가야 할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호 대상자들은 그들의 세계(혹은 질병)를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가, 그리고 그 세계(질병)는 간호대상자에게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하나님은 고무튜브, 나는 해변의 여인.

혹시, 파도 타보신적 있으세요?? 이 겨울에 춥게시리 무슨 파도냐 싶지마는..;;

음.. 저도 솔직히 서핑 보드로 파도를 타본적은 없지만, 검정색 고무 튜브로 바다에 몸을 맡겨본 경험은 좀 있습니다!!ㅋㅋ

이 파도타기는..!!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정말.. 스릴 만점입니다!!!

동해바다 깊은 물, 파도도 높고, 그 가운데 의지할 것은 고무튜브밖에 없습니다.
그 고무튜브를 몸에 두르고 바다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갑니다.
어느정도 깊어졌다 싶으면, 애써 그 고무튜브 위로 올라가 엉덩이를 걸치고 앉죠.
그리고 그때부터 고무튜브에 온전히 몸을 맡기며 파도를 즐기기 시작합니다.
찰싹 찰싹~

이제 믿을 것은 튜브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다가는 파도를 잘못 타서 해변으로 향하지 않고 더 멀리 밖으로 향하게 될 위험성이 있지만,
그래도 그 해변 근방에서 파도를 즐기는 건 정말 스릴 만점입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튜브와 내가 하나가 된 느낌이랄까요?? 😀
그런데 요즘들어 이런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은 검정색 고무튜브같고, 나는 해변의 여인같다..

헤헷^^

하나님과 파도를 같이 타는 것..
역시나 스릴 만점입니다. 오히려 그 이상이죠!!

그분께 온전히 내 몸을 맡긴 채, 나는 편안히 누워 여유나 부리고 있을지라도, 고무튜브같은 하나님은 파도를 즐겁게 타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스릴을 절로 누리게 됩니다.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두렵게, 때로는 무료하게..

그런데 진짜 고무튜브와 이 하나님 고무튜브가 다른 점은, 위에서 말한 것같이 진짜 고무튜브는 자칫하다가는 더 멀리 바닷가로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바다 미아가 되게 만들 위험성을 소지하고 있지만, 하나님 고무튜브는 위험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멀리 멀리 나아가게 되어 바다에 표류하게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솔직히 걱정할 게 없지요.

어쨌든 왜 이런 쌩뚱맞은 비유를 떠올리게 되었냐 하면..

요즘들어 뭔가 제 삶에 은근히 파도가 많았거든요. 이 블로그에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음..표면적으로는 솔직히 별로 다를 게 없었는데, 저의 신체적, 사회적, 심리적, 영적 상태가(ㅋㅋ) 정말 파도를 타는 것만 같았습니다. 슉 올라갔다가도 츅 떨어지고, 츅 떨어졌다가도 슉 올라가고, 슉 올라갔다가도 잠잠해지고.. 잠잠했다가도 금새 또 슉 올라가고.. 솔직히 잠잠한 기간 별로 없이, 슉, 츅, 슉, 츅.. 정말 파도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전 이런 파도들을 타며, 내가 왜 이런 파도를 타야하나 불평해하고 힘들어 했었습니다. 정말 땀나도록 지치더군요. 더이상 파도 탈 기력도 남아있지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았더니, 실제로는 제가 직접 이런 파도들을 탄 게 아니라, 전 그저 고무튜브에 몸을 맡긴 상태였더라구요..

이걸 어떻게 알게 됐냐구요??
이 파도타는 기간동안 제가 매주 삶 속에서 치열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 청년부 목사님의 매주 금요예배 말씀 선포를 통해 매번 위로되고, 해결되고, 분명해지는 것을 계속 경험해 왔던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알게되었습니다!! ^^

너무 너무 놀랍게도, 비전에 대해 붙들고 있었을 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비전에 대해 가장 꼭 필요한 말씀을 받았고, 풍요로움에 대해 붙들고 있었을 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부와 빈에 대해 가장 꼭 필요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저 우울해하고 있었을 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너무 너무 놀랍게도 제 상태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퍼즐 맞추기처럼 꼭꼭 들어맞아 왔었습니다. 마치..

“윤혜야. 우리 이번에는 이 파도를 탔어. 어땠어?? 좀 과격했지?? 그래도 그거 잘 타고 지금은 여기에 도착했단다.”

라고 말씀해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과 같이 파도를 타고 있던거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뭔가 갑자기 스릴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죠??

이걸 그냥 쉽게 말하면.. 음..일반적으로 하는 말로 바꿔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로 간단히 표현이 될것인데..
그리고 이건 언제나 늘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던 것인데도..
고무튜브에 몸을 맡긴 해수욕장 처녀처럼, 하나님 튜브에 몸을 맡겨 하나님과 함께 파도를 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나서야, 뭔가 이 파도들도 타볼만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 낯설고 피하고 싶었던 파도들도 새로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스릴 있습니다.

다음엔 어떤 파도가 올지.
그리고 이 고무튜브는 이 파도를 어떻게 즐길지.
그리고 날 어디로 데려갈지.
하나님과 함께 흐름을 탄다는 것이 이렇게 좋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파도를 탄다는 것은.. 하나님이 고무튜브가 되어주신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너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 고무튜브는 네비게이션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정말 걱정할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무튜브, 나는 해변의 여인.
이 해수욕장 처녀는 이제 어떤 파도도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헤헷

하나님!! 가요가요!! 전 그저 하나님께 몸을 완전히 맡겨 버리렵니다!!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대학원 종합 시험부터 박사 학위 논문 연구 동의 모임(Committee)까지.

박사 학위 논문 연구 동의모임(Committee)이 무사히 끝났다.

나는 석사 때 학위 논문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동의 모임이란 것 자체가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지 긴장 반 기대 반이었기에, 나와 비슷한 처지(학위 논문을 처음 쓰는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소회 및 기록을 남긴다.

1. 종합 시험 통과까지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에서는 종합 시험이 논문 연구계획서 심사로 이루어진다.

종합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공통 필수 과목 15 학점 + 선택 과목 6 학점, 총 21 학점 이상을 이수해야 한다.

공통 필수 과목은 입학 시 교과 과정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날 수 있는데, 나의 경우가 그러했다. 난 2020년 입학했으나 교과 과정이 2022년에 개정된 바, 변경된 과정의 필수 과목 중 중복 이수할 필요 없는 과정에 대해서는 사전에 수강 면제 신청을 해두었다.

공인 영어 점수 제출도 필수인데, 박사 학위 입학 시 제출했다면 그것으로 대체 가능하다. TOEIC은 550점 이상, TOEFL은 PBT 500점 이상, IBT 63점 이상 등으로 허들이 결코 높지 않다.

박사 과정 필수 과목인 “연구의 실제” 과목은 1학점이긴 하지만 한 학기 전체의 공이 들어갈 정도로 중요하고 큰 프로젝트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학위 논문을 계획 중인 여러 동료들과 함께 교과 담당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학위 논문 연구를 개발해나갈 수 있다. 이번에는 13명의 원생이 함께 수업을 들었고, 동료의 피드백은 소중했다.

원래 난 이 과목을 이전 학기에 6학점 수업을 들으며 추가로 같이 들으려고 하였으나, 이미 이 과정을 지나간 선배님들이 다른 과목을 들어가며 이 과목을 들을 계획을 하고 있는 날 뜯어 말려 주었다. 천만 다행. 덕분에 난 지난 한 학기 동안 학위 논문 연구 계획에만 집중할 수 있었는데, ‘프로젝트를 해치워야지’ 하고 달려가는 게 아니라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한편 내가 하려고 했던 것 같이 다른 과목을 하면서 같이 하는 원생도 있었는데, 그 또한 매우 잘 해나가는 걸 목격하긴 했다 (대단했다). 또 한편 그 과정을 통해 개발한 연구계획서로 이번에 종합시험을 치루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종합시험까지 통과하긴 했지만 실제 연구는 조금 더 개발 한 후 진행하기로 한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종합 시험은 그렇게 각자가 개발한 연구 계획서를 잘 다듬어서 15페이지 이내의 분량(표, 그림, 레퍼런스 제외)으로 정리하고, 표절 검사 결과와 함께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계획서는 간호대학의 3분의 교수님들로부터 블라인드 심사를 받았고, 결과는 약 한 달 뒤에 나왔다.

다행히 무사히 통과했는데, 더 좋았던 점은 그냥 통과라는 결과만 받는 것이 아니라 심사 의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심사 의견이 담긴 PDF는 메일로 받았다.

2. 주심 및 부심 섭외

학위 논문 연구 진행을 앞두고 중요한 부분은 주심 및 부심 교수님을 모시는 일일 것이다.

나는 주심은 애초에 박사 과정을 지도해주신 최은경 교수님께 부탁을 드렸는데, 이는 최은경 교수님이 내가 아는 한 이분척추증을 가진 대상자에 대한 연구를 국내에서 가장 많이 하셨고,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이시며, 무엇보다도 그 대상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떤 고민도 없이 주심을 부탁드렸다.

다만 교수님께서는 처음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 방법이 ‘질적 연구’인데다가 ‘현상학’까지 가지고 온 터라 질적 연구를 더 잘 아는 교수님께 주심을 부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을 막상 들으니, ‘혹시 교수님께 이 연구가 (방법론에서) 좀 부담스러우신걸까? 다른 분께 부탁을 드려야 하나?’ 하고 1초 정도 고민이 되긴 했었는데, 그래도 교수님 만큼 이 주제를 같이 애착을 가지고 지도해주실 수 있는 분을 더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역시 그랬고, 교수님은 결국 열심히 한번 공부해보면서 해보자고 주심을 수락해주셨다. 이후 연구원 선생님께 들어보니, 교수님께서는 질적 연구 책을 한 무더기 구입하셨다고 한다 (난 정말 복이 많은 사람).

다음 고민은 부심 교수님을 정하는 일이었는데, 나의 경우에는 지도 교수님께서 내 연구의 주제 및 방법과 관련된 전문가이신 세 분의 부심 교수님 리스트를 명확하게 해주셨었다. 그 중 한 분은 교수님께서 직접 섭외를 하여 알려주셨고, 두 분께는 내가 먼저 부탁 드리고 수락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이자 정말 중요한 한 분, ‘현상학’ 전문가를 어떻게 모셔야 할 지에 대해 지도교수님과 함께 오랫동안 많은 고민을 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가 현상학적 질적 연구인데 요즘 간호학계에서는 이 방법론으로 연구를 아주 많이 진행하지는 않고 있다. 실은 현상학 뿐만 아니라 질적 연구로 학위논문을 하는 경우가 요즘은 거의 드물다. 하지만 나는 이미 현상학에 매료되었고, 이 방식으로 연구를 해야만 했다(너무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현상학적 질적 연구 방식에 대해 다양한 논조의 비판이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만큼,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연구하고, 제대로 심사 받으며 연구를 진행해야만 했다.

처음에 나는 주저함 없이 이남인 교수님(서울대 철학과 교수님이자 현상학의 대가)께 메일로 연락을 드렸다. 이남인 교수님의 책 및 동영상 강의를 통해 현상학의 응용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이남인 교수님은 간호 현상학에 대해 정말 진심으로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았다. 나의 연구 방법이 이남인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토대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교수님께 직접 검토 받고 조언을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영광일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메일의 회신은 받지 못했다. 두번이나 보냈는데도 회신을 못받았고, 서울대 철학과 사무실에 알아본 결과 퇴임 예정이시고 했다. 바쁘시거나, 사정이 있으시리라.. 결국 개인적으로는 너무 아쉽지만 이남인 교수님과의 연결은 일단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 이후엔 국내 학자 중 현상학적 질적연구에 대해 다루거나 연구를 직접 수행한 결과를 다룬 여러 논문을 읽어보며 저자의 프로필 및 연구력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이 현상학에 대해 잘 아는 분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한편 나의 연구 계획서의 현상학적 방법론에 대한 타당성에 대한 검증이 시급해져왔다. 그 때, 지도교수님께서 오박사님께 한번 연락해보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교수님께서 직접 현상학적 질적연구를 찾아 온라인 강의를 들으셨다는 데 (바쁘신 와중에 지도학생을 위해 온라인 강의까지 시간 내어 들으신 교수님께 또 한번 찐 감동을..) 그 때, 강의를 해주신 박사님이셨다. 그렇게 오박사님께 연락을 드리게 되었고, 연구계획서의 방법론적인 부분을 검토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질적 연구자인 오박사님과의 미팅은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짧지만 굵었던 미팅을 통해 질적 연구자의 시선에서 내가 작성한 연구계획서의 방법론에 대해 평가 받을 수 있었다. 오박사님은 현상학이 모든 질적 연구의 백그라운드라고 생각하셨지만, ‘현상학적 질적연구’와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현상학이 모든 질적 연구의 배경이 된다는 데는 나도 동의하지만, 한편 나는 질적 연구가 ‘현상학’이라는 철학에 튼튼하게 정초되어 있을 때 ‘현상학적 질적 연구’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박사님과의 대화 결과, 나의 이러한 관점과 오 박사님의 질적연구자적 철학이 다소 상충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오 박사님께서 현상학적 질적연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신 만큼 여러 조언을 받아가며 연구를 더 개발해야겠다 생각하고 부심을 부탁드렸고, 박사님은 부심을 수락해주셨다.

그러나 미팅 이후 다시 복기를 하며 그 상충되는 관점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번 메일로 여쭤보았는데, 그 때 박사님도 그 관점의 차이로 인해 부심이 쉽지는 않겠다 판단하신 것 같았다. 박사님께서는 나의 메일에 대한 회신으로 매우 부드럽고, 정중하고, 사려 깊게 부심을 거절해주셨고, 그 대신 현상학자를 부심으로 찾아보는 것이 나의 연구에는 훨씬 적합할 것이라고 조언해주셨다.

메일을 받고 정말 감사했다. 정확하게 나의 연구의 방향을 읽고 파악해주셨기에 해주실 수 있는 조언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방법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는 미뤄졌지만..)

그리고 그 때, 이미 내 안에 있던 두 분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실은 나의 목록에는 이남인 교수님 외 두분이 더 계셨다. 1순위는 현직 현상학자셨고, 2순위는 간호학과 철학을 함께 하셨으나 퇴직을 하신 분이셨다. 이 두 분의 교수님을 지도교수님께 다시 말씀드렸고, 교수님께서 1순위였던 최교수님께 연락을 드려볼 것을 권해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부심 교수님이 확정 되었다.

3. 연구 계획서 재정비

종합시험 때 제출한 연구 계획서는 재정비가 필요했다. 심사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피드백을 보완 해야 했고, 종합시험 때는 15페이지 제한에 맞춰 많은 부분들을 빼두었기 때문에 총체적인 재 구성 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미리 논문 형식에 최대한 맞춰서 작성하기로 하고, 목차부터 형식에 따라 구성하여 작성을 해두었다. 이게 처음으로 해보니,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4. 동의 모임 일정 취합

주심 및 부심 교수님 확정 후,  각 교수님께 동의 모임 참석이 가능하신 일정을 확인하여 취합하였다. 한 분의 교수님 일정이 부득이 맞지 않아 이메일로 의견을 받아서 동의모임 때 공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동의 모임 일정이 계획되었다.

5. 온라인 커미티

지도교수님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계시는 터라 나는 온라인으로 동의모임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제 zoom은 모두에게 익숙한 도구가 되었고, 발표자로서는 오히려 덜 떨리는 방식이었다. 어쩔 수 없지만 다행이었다는.

동의모임이라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진행이 될지 기대 반 긴장 반이었지만, 지도교수님께서 주도적으로 진행을 해주셨기에 나는 연구계획만 시간에 맞춰 잘 발표하고 피드백을 경청하면 됐다.

먼저 교수님께서는 외부 교수님도 계시는 만큼 각 교수님에 대해 짧게 소개해주셨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8분 가량 연구 계획을 발표하였고, 각 교수님께서 코멘트를 해주셨다. 모든 코멘트는 너무 소중했고, 갈증을 풀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교수님들께서 해주신 조언을 들었을 때 내적 갈등이 생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질문 혹은 추가 조언을 구하였고, 그것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듣고 나누며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현상학자인 최 교수님으로부터 본 연구의 방법론의 타당성에 대해 컨펌 받을 수 있었다.

총 소요 시간은 40분 정도 걸렸고, 커미티 종료 후 카페에 앉아 받은 모든 코멘트를 워드 파일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다. 주심교수님께선 이것이 이후 예심 때 코멘트 반영 여부를 검토하는 데 활용이 될 거라고 하셨다.

이렇게 커미티가 무사히 종료되었다.

받은 코멘트를 기반으로 추가 문헌 고찰 및 연구 계획서의 재구성 등 몇가지 작업이 필요하긴 하지만, 가장 시니어 교수님이신 김 교수님의 말씀대로 그야말로 “드림팀”인 심사위원 분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에 무한 감사하였다. 다행히 잘 해왔던 것 같고, 덕분에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종합시험부터 커미티까지 왔고, 3월 중순 모든 간호대학 교수님과 학생 앞에서 공개 발표를 하고 IRB 승인을 받은 후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내가 바라는 소망은 나의 연구가 그동안 그러나지 않았던 소외된 목소리를 밝혀주고, 그로 인해 그 목소리의 주인과, 그들의 가족과,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데 손톱 만큼이나마 기여하는 것이다.

못난 나를 사랑하기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기대감은 누구든지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상대평가하든 절대평가하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가평가하게 됩니다.

전 이 자가 평가때문에 때로는 우쭐해지고 자신감 충천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울해지고 자존감이 완전상실된 상태에 이르게 되기도 한답니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음..좀 더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상대평가 하는 사람들은 아마 주변의 자신보다 잘나가는 분 덕분에 자극도 받고 충격도 받을테고, 주변의 좀 못나가는 분 덕분에 위로도 받고 느슨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절대평가는 축에 꼈던 것 같습니다.
수험생 생활 시절만 돌아봐도 알수 있는데..
가끔 애들이 친구들이 이런 얘기 하던거 기억하세요?

“OO는 진짜 공부 열심히 하는 거 같아. 쟤 하는거 보면 내가 정말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맞어, 맞어. 난 맨날 졸고 있는데..ㅠㅠ”

그런데 결정적으로 저는 이런 이야기들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없었으니..왜냐!!!???

누가 얼만큼 하는지엔 도통 관심도 없었고 눈도 가지 않았거든요. 그냥 저만 잘 하면 되는거였죠. 만약 지난번에 10등했으면 이번에 8등하면 기분 좋은거고, 지난번엔 80점 맞았으면 이번에 85점 맞으면 기분 좋은거고^^

스스로 절대평가 하는 것의 행복이란~ 캬앗~

주변 사람들이 얼만큼 하는지에 별로 관심이 갖지 않았던 만큼, 이 때까지 살면서 그다지 경쟁의식을 크게 느껴오지 않아 마음의 여유를 잘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나도 쟤만큼 잘하고 싶다.”
“나도 쟤만큼 예쁘고 싶다.”
“나도 쟤만큼 잘나가고 싶다.”

만약 이런 생각을 하며 늘 항상 경쟁하며 살아야 했다면.. 으윽.. 가뜩이나 이상한 제 성격.. 더 베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타고난 절대평가 기준은 제게 있어 축복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좋은 것 만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은!!
늘 항상 제 스스로에게 굉장히 높고 형이상학적 수준을 기대해왔었기 때문입니다.

“난 지난번엔 이정도였으니 이번에도 최소한 이정도는 기대해야지!!”
“난 뭘 하든 최소한 이정도는 해야돼!!”
“난 이 정도는 지킬 줄 아는 얘가 되야해!!”

공부든, 인간관계든, 도덕성이든, 신앙이든, 뭐든지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만약 제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감이나 죄책감을 갖기도 했죠.

견디기 쉽지 않은 좌절감..ㅜㅜ

그런데!!!
[향기로운 인격만들기]를 읽다가 이런 저의 모습을 분명하게 표현해주는 것을 읽게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저만 이런게 아니더군요!!! 헤헷..안도감..

이상적인 자아
우리는 모두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희미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상상해 볼 수 있다. 잠시 동안 완전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보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라. 이렇게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당신이 상상해보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적 모습과의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리 모두는 상상 속에 있는 완전한 모습의 이상적인 자아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자아와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 만일 이 두개의 자아가 싸우면, 우리는 계속적인 갈등을 경험한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도 사실이고 또한 실제 존재하는 자아도 사실인데, 이 둘은 서로 싸움을 할 것이다.

진정한 자아
진정한 자아는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을 말한다. 진정한 자아는, 아무리 이상적인 모습이 되려고 노력했었다 할지라도 이상적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실제는, 우리의 자아가 타락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잃어버렸다. 우리는 연약하고 타락한 상태에 높여졌다.
이상적 자아와 실재와의 관계
이상적인 자아와 진정한 자아와의 사이에 현존하는 문제는, 이상적인 자아가 진정한 자아를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단정지으면서 진정한 자아를 정죄하고 화를 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둘 사이에 원수관계가 성립되며, 모든 적수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점점 더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헨리 클라우드,[향기로운 인격 만들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교회를 다니며 어렸을 때부터 높은 도덕적 기준을 들어왔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등..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형제를 욕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죄를 지은 것이고, 음란한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헐..

말씀대로 살고 싶었던 만큼 이런 말씀을 내면화 시키려고 해왔었고, 그랬던 만큼 제 안의 많은 것들을 못난이 취급 해왔었습니다.

제 이상적 자아는 제가 생각만으로도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천사같은 아이, 생각으로도 음란한 생각 하나 안하는 정결한 아이이고 싶어하지만, 현실적 자아는 절대 그렇지 못했거든요. 화도 내고, 야한생각도 하고.. 그러다 만약..

막 욕하는 마음이 생기면 금새 깜짝 놀라서 ‘아니!! 니가 이런 마음을 품어?? 당장 사라져!!!!!’

막 야한 생각이 들면 무슨 더러운 똥을 밟은 양, ‘아니!! 니가 이런 생각을 해?? 구역질나!! 당장 꺼져!!!’

라고 제 스스로에게 소리를 질러왔습니다. 누구에게도 잘 소리지르지 않는 제가..ㅠㅠ 제 스스로에겐 아주 가혹하게..ㅠㅠ

문제는..!!
어쨌든 막 욕하는 마음을 품었던 것도, 막 야한 생각을 했던 것도 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성적이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 것도, 인간관계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던 것도, 모두 제 자신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제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고 밟아왔으니.. 진짜 제 모습이 건강하게 살아있겠습니까?? ㅠㅠ

더군다나 제가 저의 이런 못난 부분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완벽한 천사같은 애가 되려고 하는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은혜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았습니다. 힝.. 그런걸 보면.. 전 그동안 예수님의 진짜 은혜의 크기를 완전 축소해서 생각해왔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But..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아니 그럼 어떻게 하라굿??

이런 개인의 이상적인 기준을 버리고 그냥 생긴대로 살라는 거야?? 마음 편하게 살라는거야??

Oh, No~No~

헨리클라우드 박사는 우리의 이상적인 자아를 삶의 목표로 삶고 우리의 현실적인 자아를 수용하고 사랑해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적인 자아를 삶을 필요, 요구 조건으로 삶는 것과 삶의 목표를 삶는 건 천지차이겠지요!!?? ^^)

어쨌든 이 이상적인 자아도, 현실적인 자아도 모두 나 자신의 일부니까요.. 이 둘을 화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론이 너무 심플한가요? 그런데 제 생각에도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하신 제 자신을 만약 제가 정죄하고 있다면, 그건 예수님이 기꺼이 흘리신 그 보혈을 무시하는 꼴이 되잖아요.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제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는 건,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욕망과 다를 바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되고싶어 하는 가장 무서운 인간의 욕망..

정말..하나님께서 이미 제게 허락하신 많은 좋은 것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제게 있는 악한 것들로부터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무시해왔었던 제 완전하지 못했던 제 모습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그동안 무시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ㅋㅋ)

앞으로는 인정하고 사랑해주겠다고 사랑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내 안의 좋은 것도 나, 나쁜 것도 나!!

이제껏 무시당해온 윤혜안에 있는 윤혜야. 내가 앞으로는 널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께.
그동안 더러운 냄새난다고, 구역질난다고 냅다 버리려고 했던거 미안해..그래도 넌 내 자신인데 말이야..

예수님이 널 사랑하신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내 마음으로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못했던 거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꼭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께. 꼭 그럴께.

또 실수한다고 해도 상처주지 않고 너그럽게 이해해줄께. 사랑해줄께.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화나면 화난다고 자신있게 얘기해. 알겠지??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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