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생활 컴플렉스 탈출하기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별명 아닌 별명이 있는데..

바른생활 어린이, 바른생활 소녀, 바른생활 청년..이게 그것들입니다ㅋㅋ

아!! 바른생활 어린이일 때는 애늙은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것 같네요.

음.. 첫째 컴플렉스인걸까요??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척”하기 시작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선생님의 기대, 친구들의 기대, 이웃들의 기대, 목사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어린나이부터 나름대로 바락바락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바른생활 Something”의 별명을 갖긴 했지만..어렸을 때부터 별로 듣기 좋은 별명은 아니었고,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내가 정말 이런 별명을 갖기 합당한 녀석인지, 진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물음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때 저는 지극히도 모범생이었고, 엄청 도덕적일 것 같은 애었습니다.음..어쩌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눈치가 좀 없어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아니면 착하게 생긴건가요??

ㅋㅋㅋ
그런데 아직도 좀 그렇게 보이나봐요. 얼마전에 진실게임같은 것을 했는데 제 차례때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어보더라구요.

“아! 윤혜야! 너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물어봐도 될까..?? 다른게 아니고.. 너도 야한거 본적 있어?? “

헐.. ㅋㅋ

음.. 솔직히 지금은 저의 이 모습이 저의 가면인지 제 진짜 모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세상사람들이 바른생활처럼 판단하는 제 이 모습을 좀 벗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제게 너무 벅찬 일이란 것입니다. 어쨌든 전 제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한 모습만 보입니다. 보이는 것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 가면이 제 얼굴에 탁 달라붙어서 이제는 완전히제 자신이 되어버린걸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전 제 자신을 꾸며서 표현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제가 “남의 기대”, “남의 시선”을 너무나도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동시에 두렵게 여기는 것.. 어제도 잠깐 글에 적었듯이 “관계”입 니다.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합니다.

누가 절 싫어하는 것을 못견딜만큼 두려워합니다. 누가 제게 실망하는 것 또한 못견딜만큼 두려워합니다. 살다보면 절 싫어하고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데,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든 좋아하게,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게 만드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요..결국 상처만 더 깊어졌지만요..

한번 한 친구가 제게 그러더라구요. 그 친구와 심하게 틀어진 후 제가 막 그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애 쓸때였는데..

“너는 니 생각밖에 못하는것 같아. 니가 지금 이렇게 화해하려고 하는게 날 위한거니 널 위한거니..?”

두둥!!!!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절 위한거였거든요. 이 뒤틀린 감정을 스스로 감당해낼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든 빨리해결하고 더 이상 생각하거나 아파하고 싶지 않았거든요..그 친구가 더 이상 절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든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버리고 싶었거든요. 어쨌든 전 누가 절 싫어한다는 사실에 생활에 지장이 될 정도로 질색을 하는 애입니다.

그런데 오늘 뭔가 분명히 정리가 되었습니다. 얼마전부터 읽기 시작한 [향기나는 인격 만들기]를 읽으면서요.

이 책에 따르면 저는 제 경계선과 남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했더군요.
음.. 엄밀히 말하면 오늘 제가 이야기 하고 있는것들은 남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한데서 오는 문제였습니다. 제 경계선 분명하지 않았던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결론 먼저 말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과 느낌은 다른 사람의 소유인 것인데 제가 그것까지 소유하려고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행동과 제 감정 등 제 경계선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책임만 있을 뿐인데, 제 행동과 제 감정에는 전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은채, 아니,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채 남의 감정에만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제 생각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변해주지 않으면 그 상처의 책임을 완전히 그 상대방에게 지워버렸지요.

나는 착하다. 그리고 그는 나쁘다.
왜냐..
난 나름대로 할만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속이라도 편해졌으면 모르겠는데.. 여전히 “누구누구는 나를 싫어해.”라는 감정은 저의 행동과 저의 감정을 제약했고, 저를 구덩이로 몰고 갔습니다.

허참..생각해보면, 만약 제가 이런 상처조차 받지 않은 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면 그건 완전 천사였습니다.

싫은 감정 하나 내지 않고..
웬만하면 따뜻한 표정으로..

“음..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하여 당신 기분을 나쁘게 해드린 것 같은데..그런가요..? 제 어떤 것이 당신 기분을 나쁘게 해드렸죠?? 말씀해주시면 고치도록 할께요. 기분 나쁘게 해드린것 죄송해요..”

속은 부글부글 끓으면서..

그런데 저라도 막 화가 났는데 누가 이렇게 다가오면 완전 질려버릴 것 같습니다..ㅠㅠ 이런 접근은 언제나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더라구요.

그래도 전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할 말이 있었죠.

나는 착하다. 그리고 그는 나쁘다.
왜냐..
난 나름대로 할만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때까지 이런 바른생활 컴플렉스에 싸여 가능한 착하게 보이게 하면서, 남의 감정까지 소유하려고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남의 감정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작 제 스스로는 솔직하지도 못하고 썩어가면서..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라 덫 속에 갇혀 있으면서..

그런거 보면..전 절대로 솔직한 애가 아니었습니다. 착한 가면을 쓰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며,속이고 있는 애였던 거죠..ㅠㅠ 죄송합니다

감정을 부인하거나, 감정에 대한 우리의 책임(우리 자신의 감정에 대한)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것이다. 헨리 클라우드.

그래서 오늘 제 스스로 한가지 확실히 해두렵니다!!

윤혜야!!
넌 다른 사람의 감정은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애야.
그것까지 니가 조종하려고 하면 그건 주제 넘는거야.
넌 니 감정이나 잘 책임져.
이때까지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 기대 때문에 너 자신을 억눌러 왔니??
네 감정을 부인해온 횟수를 한번 세봐. 착한척 하느라..셀수 있어??
네 감정에 대한 책임을 부인해온 횟수를 한번 세봐. 다른 사람 감정 책임지면서..셀수 있어??
일단 너나 잘해 임마!!

하나님.
더이상 착하고 밍숭밍숭한..바른생활 컴플렉스에 싸여 식은 맨밥처럼 맛없는 그런 윤혜이고 싶지 않아요.

음..착한 건 좋은거 같긴 한데 제 스스로를 속이며 겉으로만 착해보이는 그런 건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제 스스로의 감정에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세요.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확실하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음..맞아요 하나님. 저 원래 좋고 싫고 분명해요. 그런데 심각한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영역에서만.. 제가 정작 민감하게 여기는 감정의 영역에서만큼은 좋다 싫다 분명히 하지 못했던거 아시잖아요.

상처 주기 싫어서, 상처 받기 싫어서.. 그런데 이런 솔직하지 못함이 더 상처를 줬고 더 상처를 받게 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하나님..당신이 허락하신 제 마음의 공간을 싱싱하게 잘 지킬수 있게 도와주세요.제 마음의 공간이 잘 환기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다른 사람의 기대와 칭찬 때문에 제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그런 바른생활 컴플렉스는 이제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이 모습이 가면인지 진짜 저인지도 헷갈리지만..일단 제 감정에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싶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하나님!!

세상에서 제일 자기 자신을 그대로 솔직히 나타내실 수 있었던 그 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현상.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1장.)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1.현상학 입문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 또는 현상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이 때 “현상”은 어떤 대상의 내용적 특성이라기보다는 대상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각기 자기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내고 우리에게 달리 주어진다. 즉, 현상학은 다양한 대상이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어(appears) 우리에게 주어지는가(givenness)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명종 시계에 대한 현상학적 관점

단 자하비는 자명종 시계를 현상학적으로 고찰하여 설명하였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자명종 시계의 특정 면 만을 볼 수 있지만, 그 면 말고도 많은 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있다(그렇지, 지금 나는 노트북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 모니터 뒤의 판은 흰색이고, 13인치고, c타입으로 충전하고…).

우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면 외에도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명종 시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배경 안에 존재한다(그렇지, 지금 나는 노트북 모니터와 책을 돌아가며 보고 있지만, 노트북과 책이 놓여져 있던 책상은 검정색이고, 외발이고, 옆에 마우스가 놓여져 있고, 오랜만에 온 카페 도노즈 안에 있고..)

“지각 경험은 결과적으로 현전과 부재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결코 고립된 상태로 주어지지 않고, 보는 것의 의미를 촉발하는 지평(horizon)에 에워싸인 채로 주어진다.”

자명종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자명종에 집중하고 있지만, 실은 그 앞에는 다른 컵, 펜, 책 등이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관심은 아니고 배경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원래는 배경이었던 자명종 앞의 책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내가 지금 타이핑을 하면서 난 모니터에 쓰여지는 글씨에 집중하고 있고, 열심히 움직이는 내 손가락은 전혀 신경도 안쓰다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 손가락이 얼마나 열일을 하고 있는지 바라보게 되는 것같이..)

“실제로 이러한 주제의 변화 가능성은 정확히 나의 주제가 그 변화와 함께 주어지는 장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장 안에서 내가 정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한편 그 자명종은 지각하는 자의 신체를 통해 지각된다. 신체적으로 보고, 만지는 등 상호작용을 하며 자명종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즉, 지각을 한다는 것은 “부동의 정보 습득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체적 활동”이다. (모니터, 책, 컵, 마우스 등등은 눈으로 인식하고, 손가락으로 타이핑하고 만지는 등을 통해 알게 되는 것 같이..)

그리고 그 자명종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은 순간적이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적 구조와 배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처음 그 조명종을 마주했을 때보다 2분 지난 후, 그리고 10분 지난 후, 그리고 지금.. 그 자명종은 나에게 점차 다르게 자신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르게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바탕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기대를 가지고 현재를 접한다.” ‘저 자명종을 우리 사무실에 가져다 두기에도 적절하겠다’라는 판단은 그냥 자명종을 보자마자 생기는 판단이 아니다. (지금 내 노트북은 내게 너무 소중하고, 너무 소중하고, 너무 소중하다.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샀고, 지금 공부하느라 매일같이 쓰고 있고, 내일도, 모래도, 글피도,, 계속 계속 내 도구가 되어줘야하니까..)

한편, 그 자명종은 누군가에게는 절대 집에 둘 수 없는 자명종일 수 있다. 즉, 그 자명종은 나에게 나타났지만,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은 내게는 너무 두근거리고 행복한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책일 수도 있겠지.)

3. 나타냄과 실재

무엇인가가 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인가, 그것의 배후에 있는 우리가 밝혀내야 할 어떤 진짜가 있는 것인가?

고전적으로 과학과 철학은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찾고자 하였으나, 현상학은 그 현상이 주는 것이 바로 그 자체로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현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감추고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다만 현상학자에게는 “그 자체로 현전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이해될 수 있는 세계(현상학적 관심)”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과학적 관심)”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두가지 현시(manifestation) 방식의 구분일 뿐이다.

현상학자들은 접근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저편으로 말미암아 객관적 실재성을 정의하기보다 객관성을 지정할 올바른 장소가 저편이 아닌 나타내는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4. 나의 성찰

나는 결과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래서 뭘 해야 하는건데?”

어쩌면 ‘나보다도 성격이 급하고 정확하고 의미있는 결론을 최대한 빨리 듣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교수님’의 ‘가뜩이나 바쁜 회진 시간’에 ‘회진을 가이딩’하며 환자를 ‘daily로 브리핑’하면서 얻은 습관일 수도 있고, 고민을 하는건 너무 소진 되는 일이니 빨리 결론을 내는 게 속 편한 아빠의 유전적 소인 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난 결론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여전히 좀 그렇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내가 아는 결론은 그래봐야 특정한 경계 안 에서의 진실일 뿐이고, 그 경계 밖 세상까지 고려한다면 그 진실에는 의문을 약간 남겨놓아야만 했다. 이것이 모든 의학 및 간호학 논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Limitation. 모든 결론은 그 Limitation안에서 해석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이런 인식을 하던 차에 만난 것이 바로 현상학이었다. 모든 객관성을 지정할 장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현상학. 현상학은 나에게 내가 평소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어야 할 철학이라고 자신을 나타냈다.

떨어진 꽃잎 같으니 (자작시)

하나님이시여.
나의 생명과 나의 호흡되시는 주여.
당신 앞에 다시 무릎으로 나아가오니
새 생명과 새 호흡을 허락하소서.
당신을 느낄 수 없는 나의 영혼은
가시덤불 깊은 속의 떨어진 꽃잎 같으니
고통속에 신음하며 매초마다 시들어갑니다.
내 영혼아 깨어라.
신선한 새벽의 새로움을 마시며
하나님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을 볼지어다.
내 영혼아 일어나라.
떠오르는 해의 경의로움을 맞으며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이시여.
나의 생명과 나의 호흡되시는 주여.
신음속에 시들어가며 당신의 손길만을 기다리오니
나를 만져 주옵소서. 나를 들어 주옵소서.
당신을 느낄 수 없는 나의 영혼은
가시덤불 깊은 속의 떨어진 꽃잎 같으니
고통속에 신음하며 매초마다 시들어갑니다.

지윤혜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사랑은 OO(이)다.

사랑은 OO(이)다.

무슨말을 OO안에 넣고 싶으세요??
여러가지가 떠오를 수 있겠죠.
느낌, 두근거림, 자극, 다크서클..등등..헤헷

혹은 케이스에 따라 다를수도 있을것 같아요.

아픔, 기다림, 성장통..

앞으로 전 이 OO 안을 채워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전, 그 시작을 이 단어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노력. 사랑은 노력이다.

글쎄요.. [사랑=노력]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은 제 가슴이 허락하진 않지만
최소한,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것은 너무 많이 느껴왔던바이기에..

그냥 느낌대로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그냥 좋은게 좋은거고, 싫은게 싫은거고..
그런데 그건 너무 이기적인것 같아요. 나 혼자만 사랑받겠다는 욕심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를 있는대로 사랑해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줄로 믿었구요.

음..간호대학 수업을 들으면서 사랑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이론에서는 사랑의 설레임을 900일로 보더라구요. 그 뒤로는 사랑의 열정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그 이론을 들은 후로, 그때 당시 연인과 함께 서로 좋아 설레여 할때마다 ‘우리가 900일 후에도 이럴 수 있을까?’라고 말하며 ‘그 이론을 뒤집어 주겠다!!’ 라고 그런 황당무개해 보이는 이론을 비웃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900일 가더군요. 정말 2년 반 지속되었습니다.

노력 없었던 그 열정의 사랑은.

그 사랑의 극이 종결된 후로부터 제 마음가운데 계속 들었던 후회와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제가 노력을 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줄 생각은 못하고 받을 생각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걸 깨닫고 너무 마음아팠습니다. 받을줄만 알고 줄줄은 몰랐던 제 이기적인 자신이 너무 못났었더라구요. 철 다 들었다고 믿었던 제 자신이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더라구요. 이런 이기적인 사랑으로 상대방을 지치게만 만들었던것 같습니다.

그 뒤로는 제게 있어서, ‘사랑’이 생각날 때마다 ‘노력’, 그리고 ‘헌신’이라는 단어가 따라옵니다. 그리고 이제 정말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사랑은 노력이다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생각나면 그냥 기도하겠습니다 (자작시)

생각나면 그냥 기도하겠습니다.
처음엔 많이 당황했습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당신이 생각날 때.
이렇게 혼자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사랑하게될까봐
당신을 날려보내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찾아오는 당신을
혹은 제가 아직 날려보내지 못한 당신을
제 가슴속에서 매일같이 발견합니다.
그리고 설렘이라는 감정에 치여
정작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마음일수도 있는데
설렘이라는 감정으로 착각해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있는걸까봐 두렵습니다.
앞으로는 그냥
생각나면 기도하겠습니다.
일부러 날려보내려고 하지도 않고
일부러 설렘이라는 감정에 빠지지도 않고
생각나면 기도하겠습니다.
비록 당신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마음을 따라
생각나면 그냥 기도하겠습니다.
생각나면 무릎부터 꿇겠습니다.

지윤혜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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