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논리연구. 4절. 심리학주의의 경험론적 귀결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4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21. 심리학주의자의 관점과 그 논박에서 두 가지 경험론적 귀결의 특징

심리학은 사실 학문이며 경험에서 나온 학문이라는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심리학이 정밀하다기 보다는 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심리학의 법칙이 정밀성을 결여했다면, 그리고 논리학이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다면, 논리학도 모호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논리법칙은 절대적으로 정밀한 것이 아닌가?
  • 혹시 심리학이 정밀한 자연법칙에 근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심리학이 어떤 법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방법은 개별적 사실에서 귀납 하는 것 뿐인데, 이는 정밀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높은 개연성’만 정초하지 않는가?정당화 된 것은 개연성이지 법칙이 아니다.

물론 심리학 등을 포함하는 사실 과학은 그 과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든 법칙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여러 가능성들이 그 사실 과학 내에서 충분히 용인된다.

하지만 이렇듯 사실과학에서 정당한 “가능성”은 논리학에서는 “불합리”할 뿐이다.

22. 고립되어 작동해 이성적 사유를 일으키는 추정적 자연법칙인 사유법칙 (독해하기 어려운 꼭지)

인간은 사유하는 자이며 이는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인간의 올바른 사유 작용을 정의하는 적합성의 본질은 어떤 심리적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곳에 놓여있어야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개연성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사유법칙은 어떤 것도 확실한 것으로 판정할 수 없다.

또한 ‘판단’ 자체와 ‘판단의 내용’으로서의 법칙은 엄연히 다르다. 즉 법칙과 법칙에 대한 인식작용은 다르다.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은 다르다!

논리 법칙이 사유를 인과적으로 지배한다고 하여, 이를 사유작용의 인과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리학주의 논리학자는

  •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은 다르고
  • 규범화하는 규제와 인과적 규제는 다르며
  • 논리적 필요성과 실재적 필연성도 다르고
  • 논리적 근거와 실재적 근거도 다르다

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23. 심리학주의의 세 번째 귀결과 그 논박

  • 논리법칙이 그 인식의 원천을 심리학적 사실성에 가진다고 주장하는가?

이는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만약 논리법칙이 심리학적 사실을 규범적으로 전환한 것이라면, 논리법칙 자체가 심리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인데, 어떠한 논리법칙도 ‘사실의 문제’를 함축하지 않고, 어떠한 인식현상도 함축하지 않는다.

당연히 경험적 법칙은 사실의 내용을 갖으며, 사실에 관한 법칙일 뿐 아니라 사실의 현존도 포함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인식의 척도에 따라 이론적으로 정초된 최고 권위를 지닌 개연성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순수논리법칙은 절대적 정밀함 속에 명료하게 정초되며, 명백하게 모호한 부분을 지닌 개연성에 정초하지 않는다. 논리 법칙은 실질적으로 한정된 영역 안에 적용되지만,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진리로 작동한다.

24. 계속

이런 논리법칙은 경험적으로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논리 법칙은 경험에 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 논리법칙이 귀납적이진 않다. 우리가 사태를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귀납이 필요하지 않고, 귀납의 불완전함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저 책상의 3권의 책이, 저 서랍장의 2권의 책보다 많다는 사실. 귀납의 불완전함은 어디에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심리학적 종속성은 심리적 연관에 관계하고, 시간적으로 규정이 되지만, 논리적 법칙은 명백히 근거와 결론의 객관적 관계에 따르고, 시간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린 이념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의 근본적 차이, 그리고 이에 따른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4절 감상평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약간 이해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수의 법칙으로 논리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가 쉬웠다.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법칙을 생각해보자.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사실은 물론 생활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책 2권보다 3권이 많다는 것. 그냥 바로 알아차려진다.

하지만 3이 2보다 크다는 것은 실재로 그 사태가 벌어졌음과도 무관하고(책 2권, 책 3권이 있음의 여부) 시간과도 무관한 것이다(지금이든 어제든 내일이든.. 상관 없이 적용됨). 결국 이러한 논리 법칙은 실제 경험에서 심리학적으로 귀납적으로 발견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런 모호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설은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이토록 치열하게 하고 있다. 후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 분명하다.

후설. 논리연구. 3절. 심리학주의, 그 논증과 통상적 반증에 대한 견해

앞서 1절과 2절에서 논리학은 기술적이고, 규범적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규범적인 논리학은 이론적 기틀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설은 이에 이어 논리연구 3절에서 논리학의 이론적 기틀이 과연 심리학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17. 규범적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가 심리학에 있는지의 쟁점

그렇다면 어떤 이론적 학문이 학문이론의 본질적 기초를 제공하는가?

현재는 심리학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 논리적 기술학에 유일하고도 충분한 이론적 기초를 준다고 이야기 한다. 밀은 “논리학의 이론적 토대는 총체적으로 심리학에 의거하며, 기술의 규칙들을 정초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심리학에 포함한다”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18. 심리학주의자의 논증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어떤 소재를 기술적으로 처리하였는지가 그 소재의 성질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게 되는데, 인식을 처리하는 규칙을 다루는 논리학은 당연 심리학에 귀속되지 않겠나?”

19. 이에 대립된 측의 통상적 논증과 심리학 주의의 응답

반대 입장: “논리학은 사유작용의 규범 법칙을 다루고, 심리학은 사유작용의 자연법칙을 다룬다. 논리학의 원리를 심리학에서, 즉 우리의 오성을 관찰한 것에서 찾는다면 사유작용의 우연적 법칙에 대한 인식으로 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의 우연적 규칙이 아니라 필연적 규칙을 추구한다”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오성의 필연적 규칙도 사유 작용의 법칙의 특수한 한가지 경우에 불과하다.특수한 경우라고 하여 심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반대 입장: “근본적으로 심리학의 과제와 논리학의 과제가 다르다. 심리학의 법칙은 심리와 경과를 인과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하지만 논리학은 그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진리의 내용, 즉 참인 결과를 위해 필요한 성질과 필요한 경과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그런데 논리학도 인과적 연관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으며, 자연적 연관을 연구하지 않고 이념적 연관을 추구할 수는 없다.”

반대입장: “논리학은 심리학에 기초를 둘 수 없다. 모든 학문이 논리학과 규칙과 조화를 이룸으로써만 학문이기 때문이다. 심리학도 논리에 근거할 때 심리학일 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순환론이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이는 논리적 규칙에 따라 추론하는 것과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을 동일시한 관점이다. 심리학이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되는것인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 YJi: 즉, 후설은 심리학주의자들이 심리학이 논리학의 이론적 기반이라고 하는 것에 반박하고자 하지만, 당시까지 그러한 심리학주의자에 대한 반대입장의 논지가 튼튼하지 못했음 또한 지적하고 있다.

20. 심리학주의자들의 논증이 놓친 빈틈

후설의 입장: 심리학주의자의 논쟁을 통해 확인 된 것은, 단지 심리학이 논리학을 기초짓는데 함께 관여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어디에도 심리학이 논리학에 본질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심리학에 독립적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이끌어 갈 ‘순수논리학’이 자리 잡을 곳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모든 논리적 규제가 궁극적으로 관련되고 그래서 논리적 진리에 관해 논의하는 경우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만 할 질리가 곧바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진리 속에서 논리학 전체에 본질적인 것을 쉽게 보게되고 그 진리의 이론적 통일을 ‘순수논리학’이라는 명칭으로 쉽게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써 (순수논리학의) 참된 상태가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실제로 입증할 수 있기 바란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3절 감상평

요약해보자면,

논리학은 실천적 기술학이고, 규범학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 규범적 명제가 타당화될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이론이 심리학에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심리학주의자의 의견(즉, 모든 사유작용에 대한 법칙은 심리학에 귀속된다)에 대한 반대 입장은 논리학의 규범적 특성에 기반하여 있어왔으나 그 논리가 부실한 수준이었다. 한편 너무나도 자명해보였던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또한 허점이 있었으니, 심리학이 논리학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논리학의 본질적 기초가 된다고 증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순수논리학이 필요하다.

라는 뜻인 것 같다.

확실히, 인간의 논리적 사유작용을 생각해볼 때 이는 심리학과 무관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 규범적인(당위적인) 특성을 심리학에서의 우연적 인과법칙에서 찾는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도 맞고, 이런 심리학만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기초가 된다고 보긴 어렵긴 어렵겠다. 어쨌든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심리학은 그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심리학이 아니고서, 순수 논리학이라 할지라도, 과연 인간이 그 사유의, 논리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하는 순수 논리학을 전개해나갈 수 있을까?

내용은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고있다. 그리고 순수논리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과연 후설이 찾아갈 순수논리학이란 것이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제시하는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수 있을지는 궁금하다. 아니면 사유의 필연적 법칙 이야기를 하는 건 반심리주의학 입장이고, 후설은 이것까지 찾으려는 건 아닌건가..?

여전히 어렵다. 어려워.. 뭐.. 일단 후설 선생님의 글을 읽어가곤 있긴 하다.

후설. 논리연구. 2절. 규범적 분과의 기초로서 이론적 분과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2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13.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관한 논쟁

앞서 논의한 것과 같이 논리학은 실천적 성격을 띈 기술학이라고 정당화 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논리학의 기술적 성격에 대해 부인하는 입장이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칸트는 우리가 올바로 *오성을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 임무를 맡은 응용논리학에 대해 이야기 했다.

  • *(칸트의) 오성: 감성 및 이성 다른 두 능력에 대비하여 대상을 구성하는 개념 작용의 능력인 지력 –>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생긴다.’

여기서 응용논리학은 오성(개념 작용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응용논리학을 한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완전한 독립학문으로, 순수이론적 학문으로 현존시켰다.

결국 두 가지의 입장이 대치되게 된다.

  • 기술학으로 파악된 모든 논리학은 고유한 이론적 학문, 즉 ‘순수논리학’을 기초로 한다 (칸트, 헤르바르트, 베인, 드로비슈 등).
  • 논리적 기술학 속에서 확인되는 모든 이론적 학설은 타 학문에 포함된다. 즉 그 자체적으로 근거하는 고유의 이론은 없다 (베네케, 밀, 지그바르트 등)

이 두 가지의 입장은 모두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무엇이 맞는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앞서 논의하였듯이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학문 자체에 대한 논쟁이며, 그러한 논쟁이 있음은 그 학문이 아직 불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규범적 학문의 개념. 규범적 학문에 통일성을 주는 근본척도 또는 원리

잠시 규범적 학문이란 무엇인지 따져보자.

규범이란 실재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더라도,’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위해 우린 여러 종류의 규범적 명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너는 내 말에 따라야만 한다’, ‘군인은 용감해야만 한다’, ‘인간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등등). 이 규범적 명제에서는 어떤 부류의 대상에 대해 일정한 의미에서 ‘좋은'(가치 있는) 또는 ‘나쁜'(무가치한)의 개념이 생기는 가치 태도를 전제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태도에서 우리는 ‘더 좋은’과 ‘가장 좋은’, 그리고 ‘더 나쁜’과 ‘가장 나쁜’ 등을 구별하며 무엇이 그러한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에 대해 더 가까운 조건이고, 먼 조건인지, 혹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인지 등을 따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그 가치를 최대로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는 규범적 명제를 가질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근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들어 칸트 윤리학의 ‘정언명법’, 혹은 공리주의자의 윤리학에서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등이 이에 해당 된다. 이 때 이 근본 규범은 어떤 것이 규범화 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해줄 뿐, 어떤 규범적 명제도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때 이 근본 규범의 총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목표를 세운다면, 그것은 규범적 분과의 이념이 생긴다.

즉, 각각의 규범적 학문은 자신의 고유한 근본 규범을 갖고, 이 근본 규범은 그때그때 규범적 분과의 통일원리를 서술한다.

15. 규범적 분과와 기술학

특히 우리는 실재적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관심이 있으므로, 규범적 분과의 개념을 기술학의 개념과 동일하게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모든 기술학은 규범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술학은 근본 규범이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의 특수한 경우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학은 실천적이지 않은 분과 또한 포함한다. 왜냐하면 기술학의 과제는 실천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목적을 다룬다기보다, 우선 실현할 수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규범을 확립하는데 더 좁은 과제가 해결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적 가치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변하는 모든 규범적 분과는 기술학으로 확장된다.

16. 규범적 분과의 기초인 이론적 분과

근본규범(또는 근본가치, 궁극적 목적)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분과들의 통일을 규정한다. 또한 근본규범은 규범화하는 생각을 그 분과의 모든 규범적 명제로 갖고 들어온다. 그러나 근본규범에서 측정한다는 이러한 공통적 생각 이외에 이 규범적 명제는 다른 명제와 구별되는 고유한 이론적 내용을 갖는다. 각각의 규범적 명제는 규범(Norm)과 규범화된 것(Normiertes) 사이의 측정하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형식의 모든 규범적 명제는 오직 ‘B인 A만이 C의 성질을 갖는다’는 이론적 명제를 포함한다.

  • YJi: 예를 들어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전인적인 간호만이 진정한 간호이다’라는 간호학의 이론적 명제를 포함하며, 여기서 ‘진정한 간호’라는 새로운 명제는 순수 이론적 명제이고, 어떤 규범화하는 판단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C자체에 대한 가치 태도가 생기면, 그에 따라 ‘오직 B인 A만이 좋은 것이다’,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규범적 형식을 받아들일수 있다.

  • YJi: 즉, ‘진정한 간호’라는 명제에 대한 가치태도가 생길 때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규범적 형식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C의 존재는 규범적 학문의 명제 속에 끼워져 있는 이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일정한 이론적 학문 속에서 논리적 자리를 가져가야만 한다.

따라서 규범적 학문이 자신의 명칭에 걸맞아야하면, 규범화할 수 있는 사태와 근본규범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규명해야 하면, 규범적 학문은 이러한 관계의 이론적 핵심내용을 반드시 연구하고 그래서 관련된 이론적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모든 규범적 분과는 어떤 규범도 아닌 진리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규범적 학문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는 어떠해야 하는가?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2절 감상평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 우리는 1절에서 논리학이 기술학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기술학인 논리학은 그만의 독립적인 이론적 기틀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학문을 기틀로 하는가?
  • 앞서 논의하였듯이 논리학은 규범적이라 한 것을 짚어보면, 규범적인 학문은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 고유한 근본규범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체를 이룬다. 따라서 그 근본규범은 일정한 이론적 체계 내에 있어야 한다.

뭐 이런 뜻인 것 같다. 누가 동화책같이 써둔 것은 없을까? 독해가 너무 어렵다..

후설. 논리연구. 1절. 규범적 분과 특히 실천적 분과로서의 논리학.

후설 당시, 논리학을 둘러싼 당대의 주요 경향은 다음과 같았다 (박승억).

  1. 논리학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 (심리학 주의)
  2. 논리학을 형식 학문으로만 보려는 경향
  3. 논리학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

이러한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서 후설이 정리한 쟁점의 시작은 “논리학은 이론적인 분과인가, 실천적인 분과(기술론)인가?” 였다.

이에 따라 후설은 제 1절에서 규범적 분과 특히 실천적 분과로서의 논리학이라는 주제로 논지를 전개한다.

4. 개별 학문들이 이론적으로 불완전한 점

모든 개별 학문들은 이론적으로 불완전하다. 그 까닭은 각각의 학문들이 지금까지 발전되고 확장되어오긴 하였으나, 그 학문적 작업 행위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통찰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학문 가운데 가장 진보한 “수학” 조차도 고대 기하학의 기초 및 허수 둥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볼 때 그 학문의 궁극적 근거가 분명하다고 할 수 없다.

학문은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발전하였고 그 결과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힘을 얻게 되었으나, 그 학문의 근거를 찾아들어가보면 이론적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5. 형이상학과 학문이론을 통해 개별학문들을 이론적으로 보충하는 것

이러한 학문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통찰을 위해서는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부류의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껏 크게 관심이 없어왔으나, 적어도 형이상학은 실재적 현실과 관련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전제를 확정하고 검증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형이상학적 기초는 실재적 현실을 다루는 학문에는 관련이 될 수 있으나, 실재적 현실로부터 독립적인 순수 이념적 규정을 지닌 순수 수학적 학문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모든 학문에 동일한 방식으로 관계하는 “학문 일반을 학문으로 만드는”, 즉 “학문에 대한 학문”, “학문이론“이 필요하다.

6. 학문이론으로서의 논리학의 가능성과 그 정당화

그렇다면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은 수많은 개인이, 알고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적으로 준비된 것들의 총체이다. 학문은 인간에게 앎을 가능하게 하고, 앎의 가능성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은 앎에서 진리를 얻게 된다. 따라서 이 앎을 위해서는 명증성, 즉 우리가 인정한 것이 존재하고, 거부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쾌한 확실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명증성은 진리 자체를 직접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진리에 대한 이런 절대적 인식이 없다. 그대신 우리는 다소간의 높은 사태의 개연성에 대한 명증성을 사용할 뿐이다. 즉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비교적 명증하고, 비교적 높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학문적 인식은 명증성이 도달하는 그만큼 까지 앎이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앎의 모든 것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수가 동일한 것을 경험하며 “앎”을 갖게 한다고 하여 그것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학문은 이론적 의미에서의 체계적 연관을 요구하며, 이 연관에는 앎을 정초하는 것과, 그 정초에 필요한 질서를 세우는 것을 포함한다. 그 결과 학문은 가능한 한 완벽하게 최고의 이론적 목적에 상응하는 정도와 형식으로 앎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체계적인 방법적 절차가 있을 때 앎이 학문이 되며 이에 따라 명증성이 생긴다.

한편, 그러다 보면 학문이 특정 사태를 본연의 방법적인 방식으로만 처리할 때 은폐되어 남아있는 진리나 개연성이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보조적인 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즉, 학문이론, 즉 논리학이 필요하게 된다.

개별 학문들은 무수한 통찰과 경험이 축적된 이 방법적 보조수단을 사용함으로써, 그 학문의 처리방식을 검토하며 규범과 규칙을 수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7. 계속. 정초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징 (독해가 안되는 꼭지..)

첫째, 정초는 그 내용과 관련해 확고한 구조를 가진다.

둘째, 우리는 정초를 즉시 알아차리며, 정초를 단번에 정당화하게끔 허용하는 일반적 법칙과 일정한 관계에 있다.

셋째, 정초의 형식은 인식의 영역에 있으며, 객체에 대한 정초가 변경되지는 않으나 학문의 영역에 따라 날카롭게 구분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정초의 형식은 존재한다. 인식의 영역은 제한되지만 모든 종류의 추론은 일반화되고, ‘순수하게 포착되어야 한다.

8.이러한 특징과 학문 및 학문이론의 가능성의 관계

정초가 없다면 학문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학문은 인식에서 인식으로 진보가 되며, 이미 실현된 정초에서 새로운 정초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초가 없다면, 앞서 주어진 명제를 증명하고 탐구하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는 이것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능한 모든 그룹의 명제를 앞서 제시한 명제에 대한 전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 철저히 검사해야 하지 않는가? 여기에서는 가장 영리한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보다 아무것도 더 갖고 있지 않으며, 가장 영리한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보다 도대체 본질적인 것을 더 많이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풍부한 상상, 광범위한 기억, 긴장된 주의력 등은 훌륭한 것이지만, 법칙적 형식으로 정초하고 고안해 내는 오직 사유하는 존재자의 경우에서만 그 지적 의미를 획득한다.

즉, 학문에 있어서는 요소 뿐 아니라 그것을 결합하는 형식이 재생산의 효력을 갖게 되며, 이러한 형식이 학문 고유의 예견하는 직관과 예언의 특성을 가능하게 한다.

개별 학문도 이럴진데, 범위가 넓은 “앎의 영역”에 관한 형식은 어떻겠는가? 우리는 1)모든 학문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학문이론과 2)개별과학의 이론과 방법에 관계하며 이를 보충하는 특별한 연구가 필요하다.

9.학문의 방법적 처리방식. 일부는 정초, 일부는 정초를 위한 보조작업.

정초를 위한 보조작업: 정초를 위해서는 명백한 기호를 써서 적절한 방식으로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특히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데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호체계이므로 학자(사상가)는 기술적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언어를 선택하고, 전문용어를 잘 정의해야 한다.

정초: 방법적인 처리방식은(계산처리, 별의 위치, 전기의 저항 등등) 정초의 연관을 통해 선정되며, 이 정초의 연관은 방법적인 절차가 맹목적으로 실행되더라도 객관적으로 타당함을 드러낸다.

10. 학문이론의 문제로서 이론과 학문의 이념

개별적 정초는 학문을 형성하지 않는다. 학문은 정초연관이 통일될 때 가능하며, 이러한 통일의 형식은 모든 학문이 추구해 노력하는 최고의 인식 목표를 달성하는데 사용된다.

결국, 학문이론은 이러저러한 성질의 체계적 통일체로서 학문을 다루게 된다. 이는 통일체를 형식에 따라 학문으로 성격 짓는 것, 이들 상호 간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 이들의 내적 분류를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본성이나 형식의 영역으로, 즉 상대적으로 완결된 이론으로 결정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에 따라 학문이론은 1)학문 속에 등장하는 앎의 방법을 다루는 과제 뿐만 아니라, 2)그 자체를 학문이라 부르는 것을 다루는 과제를 갖는다. 학문이론은 타당한 정초를 부당한 것으로부터 구별하고, 타당한 이론을 부당한 이론으로부터 구별한다.

11. 규범적 분과로서, 기술학으로서 논리학 또는 학문이론

결국, 이에 따르면 학문이론(논리학)은 규범적 분과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일정한 목표를 향하고 있으며 그 목표에 적합하게 판단되어야 하고, ‘학문의 참됨’과 ‘방법의 참됨’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의 적합성에 달려있다. 이 때 근본 규범이 목적이 된다면, 규범적 분과에서 기술학이 나오게 된다. 즉, 타당한 방법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에 대한 탐구, 진리를 찾는 방법적 규칙, 학문 경계의 설정과 규칙, 학문에서 촉진되는 방법을 고안하거나 적용하는 규칙 등을 세우면 학문 이론은 학문의 기술학이 된다.

12. 이와 관련된 논리학의 정의

논리학이 이와같이 기술학이라는 것과 관련된 정의는 다양하게 이루어져왔지만, 아직 더 상세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

논리학을 학문적 인식의 기술학이라고 정의한 슐라이어마허 조차도 그의 정의에서 논리학의 목적이 “학문적 인식”임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고, 논리학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제시한 볼차노조차도 논리학을 학문적 교과서의 기술에 대한 보조수단 정도로만 제시하고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절 감상평

그러니까..요약해보면, 학문은 정초에 정초에 정초를 거듭하며 구축이 되어가는 체계적 지식체이다. 이러한 학문 자체를 다루는 이론을 학문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앎의 방법을 다루는 것 뿐 아니라, 그 정초의 타당성도 분별해야 하는 과제를 갖는다. 즉 학문이론(논리학)은 규범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규칙 등을 세운다는 차원에서 기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렵다. 어렵다. 나의 낮은 문해력에 도전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몇번이나 내가 지금 이걸 왜 읽고 있나 되돌아보게 된다. 두뇌 트레이닝의 과정…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코멘트 부탁드립니다..꾸벅..

후설. 논리연구. 들어가는 말(연구의 필요성)

1. 논리학에 대한 정의와 그 학설의 본질적 내용에 관한 논쟁

논리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정의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건 밀(J.S.Mill)이 흄의 연상심리학에 영향을 받아 귀납법적 논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이래 논리학에서 “심리학적 경향”이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의 “형식적 경향”, “형이상학적 경향”또한 계속 전파되며, 논리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2. 원리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갱신할 필요성

여러 사상가들이 논리학을 확실한 길로 이끌려고 하였으나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추구한 “목표”가 불분명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학문의 “목표”는 그 학문의 “정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정의는 학문의 경계를 명백하게 포함해야 한다.불명확한 경계로 인하여 전혀 다른 분야가 혼합 되는 것은 위험하다.

이에 따라 저자는 본 연구를 통해 현대의 심리학에 기초한 논리학이 이러한 위험에 놓여있음과, 이로인하여 논리적 인식의 진보가 억제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3.쟁점. 선택해 나아갈 길

현재 논의의 진영은 다음의 두 입장으로 정리된다.

  1. 논리학은 심리학에 독립적인 이론적 분과이며, 동시에 형식적이고 논증적인 분과이다.
  2. 논리학은 심리학에 종속적인 “기술학”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 두 개 사이의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논리학의 본질적 목적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하여

  1.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2번 입장의 의미와 정당성을 확인하고,
  2. 모든 기술학의 중요한 기초를 형성하고, 순수한 논증적 학문의 특성을 지닌 이론적 학문을 선별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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