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Husserl) 공부하기 – 부제: 사태 그 자체로에서 후설 그 자체로의 환원.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후설에 대한 강의를 결재했다.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2차 문헌만 가지고 응용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뭐.. 꼭 현상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남편 하나 이해시키지 못하는 게 한심스러워서만은 아니지만, 내가 남편 하나 설득 못시키면 누굴 설득시키겠는가..?

그래서 결국, “사태 그 자체” 에서 “후설 그 자체로” 환원했다.

일단 후설의 “논리연구”와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이라는 비교적 후설 초기 연구에 대한 박승억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표현 자체에 익숙해지자 싶어 후루룩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문득 부상하는 정체성 혼란..

‘나는 어디에…? 나는 누구…?’

분명히 나의 시각과 청각은 강의를 지각하고 있을 터인데, 나의 의식만큼은 강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수많은 순간들.. ‘나는 간호학자인가 철학자인가..?’, ‘순수 의식이 어떤 속성을 갖는지는 나와 무슨 상관인가??’, ‘다양체고 뭐시기고, 유클리드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어쩌고..이게 다 뭐인교..’, ‘차라리 메를로-퐁티 강의를 들어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신체적 현상학적 관점이나 더 학습할걸 그랬나..’, ‘현상학자는 어쩌다 현상학자가 되는걸까?’ …………..’어? 강의 들어야지..!!!!!!!!!!!!!!!!!!!!!’

그래도 어찌저찌됐든 속도감 있게 한번 쭉 들어보니, 나의 위치 파악정도는 어렴풋하게 되긴 한다.

  • 후설은 모든 경험과학이 정초하기에 마땅하고 타당하고 온전한 기반이 되는 지식(철학)을 추구하며 그것을 현상학이라 칭하였고, 현상학이 탐구 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을 던졌다.
    • 그리고 그 이후에 수많은 현상학자들이 그 과제를 섬세하게 탐구해나가며 여전히 그 숙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즉, 경험과학이 정초하기에 마땅하고 타당하고 온전한 기반이 되는 지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경험과학을 탐구하는 나와 같은 학자들은 1) 현상학의 지식 찾기 방법론을 수용하여 각각의 경험과학을 더 엄밀하게 탐구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2) 현상학에 기반을 둔 경험과학을 세움으로써 더 엄밀한 지식체를 만들고자 하고 있다.

즉,

  • 나는 내가 간호학을 어디에 정초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 간호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 현상학의 방법론에도 익숙해야 한다.
  • 그러면서 그 현상학이라는 토대 위에 간호지식체를 세워가는 일을 해야 한다.

이건 그냥 어렴풋이만 그려봐도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요즘 간호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경험과학들은 4차 산업혁명의 흐름 속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디지털 트렌스포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AI, 빅데이터 등을 적극 활용하며, 나름의 긴장감을 가지고 따라가고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나는 이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때 따라가더라도, 그 학문과 전문직이 꼭 놓치지 않아야 할 본질을 잘 지킨 상태에서 그것을 수용할 때 더 의미 있는 사회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모종의 믿음 같은 게 있었다. 그러다 만난 현상학인지라.. 여기가 내가 누울데인가 싶었는데~

진짜 누울때가 되어서도 끝은 안날 수도 있겠다는 상황파악이 좀 되어가다보니, 약간은 주춤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일단 하는 만큼 해 봐야지. 어렵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6장.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문)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현상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한편으로 현상학은 본질주의의 한 형태로 특징지어진다. 단지 상이한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 설명이나 사실적 설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은 의식의 흐름, 체화, 지각 등의 불변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와 인간 실존을 탐구하기 위한 출발점은 현사실적 존재로 남아있다. 현상학은 단순히 본질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라 현사실성의 철학이기도 하다.
  2. 현상학은 초월철학의 한 형태다. 그것은 경험과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반성을 추구하며,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그 가정들(특히 마음-독립적 세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가정)을 유보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상학은 반성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며, 철학의 핵심 임무는 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3. 현상학은 엄밀하게 ‘학’으로서의 철학을 확립하고자 하지만, 또한 우리의 생활세계를 설명하고 공간과 시간, 세계에 대한 선과학적 경험을 정의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4. 현상학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분야로 자주 기술된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그 자체로 주어진 것으로 기술한다. 현상학은 경험의 신경생리학적 기원 또는 생물학적 기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인과적 설명을 제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후설 자신도 발생적 현상학, 즉 지향적 구조의 기원과 발전, 역사성을 분석하는 현상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1. 본질과 경험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하지만 생활세계에 곤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다.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고, 그 방법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으나, 메를로-퐁티의 주장대로 우리는 우리의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 또한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주체성과 상호주관성

현상학에서의 “주체성”은 감추어진 내면성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여는 것으로, 나는 단순히 나에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에 대해서도 존재하며, 나에 대한 이해는 나만의 이해가 아니라 타자들의 이해를 포함함을 인정한다. 세계는 주체성과 상호주관성과 분리 불가능 하며, 현상학의 과제는 세계, 주체성, 상호주관성을 그 고유한 연결 가운데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3. 당연하지 않은 세계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명백하기에 보통 그것에 대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상학은 이렇게 무시된 명백함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멋진 세계를 이해하고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을 중단할 필요가 있다.

4. 사실적 경험의 풍부함을 포착하는 것

현상학적 탐구는 사실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이행해나가지만 본질을 찾는 것이 분석의 목적이 아니다. 본질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사실적인 것의 풍부함을 포착하기 위함이지, 현사실성을 추상화하고 무시하려는 욕망 때문이 아니다.

5.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

메를로 퐁티는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세계 속의 유한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세계에 몰입된 삶을 단번에 단절할 수 있는 절대적 반성을 수행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환원을 실행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6. 현상학은 진행중

현상학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항상 진행중이라는 사실은 고쳐져야 할 결함이나 단점이 아니라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다. 현상학은 견고하고 융통성 없는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대한 경이이자 끊임없는 운동이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 (김동규 옮김)”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현상학의 발전: 정적&발생적, 후설&하이데거&메를로 퐁티 & 표층&심층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5장)

후설의 현상학만 해도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에 상당한 진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발전적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1.정적&발생적

후설의 초기 저작의 현상학은 정적 현상학(static phenomenology)으로 이 때는 탐구 대상이 모두 발생이나 역사성이 아닌 지향적 상관관계였다. 그러나 후설은 지향성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는 속성을 깨닫게 되고, 지향성의 시간적 생성을 검토하는 발생적 현상학(genetic phenomenology)를 수행하였다. 이 때, 발생적 현상학의 범위는 개별적 자아의 경험적 삶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른바 세대간 현상학(generative phenomenology)를 모험적으로 시도하며 전통과 역사의 구성적 역할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2. 후설&하이데거&메를로-퐁티

현상학의 발전을 추적할 때는 체화, 시간성, 그리고 사회성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설은 신체가 본질상 대상들에 관한 지각과 상호작용에 관여한다고 주장했으며, 초기부터 시간성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아서 이 차원을 무시한 지향성에 대한 탐구는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설은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상호주관성 개념을 채택하고 논의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후설은 후기 논의의 초월적 분석에서 체화와 역사성, 상호주관성의 주제를 아우르며 포함하였고, 이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가 추구했던 것과 같다.

특히 하이데거는 생활세계를 주위세계, 더불어있는 세계, 그리고 자기-세계라는 세 영역에 대한 해석으로 기술하고, 현존재를 언제나 타자들과 함께 있는 존재임을 밝혔다. 그리고 메를로-퐁티는 주체성을 타자성을 향한 개방성 및 외재화의 운동이자 지각적 자기-초월임을 밝히며 상호주관적 삶과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한편, 메를로-퐁티는 후설보다 체화와 현사실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하이데거는 후설보다 전통이 우리 생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강조하며 현상학을 전개하였다.

3. 표층 현상학 & 심층 현상학

표층 현상학은 특정한 대상 유형과 특정한 지향 작용사이의 상관관계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지만, 심층 현상학은 지향적 능동성이 심층-차원에서 어떤 수동성의 과정에 의해 정초되고 조건지어지는지 등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후설에 따르면 주어진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념을 형성하는 우리 인간이 이렇게 심층에서 수동적이고 익명적으로 기능하는 차원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대상을 향한 각각의 지향성이 고유한 다양한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근본적인 현상학적 차원을 특성화하고 분석하려는 시도가 바로 심층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구체적인 과제가 우선 대개 보이지 않게 감춰진 채로 있는 것을 열어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미셸 앙리는 “보이지 않는 것의 현상학”이라 불리는 것을 발전시키려 했다.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현상학자들은 현상학이 대상을 향한 지향성 및 대상-현시의 고정성과 점유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4. 나의 성찰

일단 후설이 제1대짱이시구만.

이쯤되니 철학하시는 분들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뿐이다.

인간의 사유란 무엇인가.. 나의 단세포가 좀 부끄러워져서 안되겠다. 세포분열을 좀 시키고 싶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본질?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4장. 과학과 생활세계)

1. 현상학에서 본질은 무엇인가?

철학자는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본질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단 자하비도 “철학자로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연한 특징과 우연한 속성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설은 생활세계, 지향성, 체화, 시간성 등 근본적인 주제의 불변하는 보편적 구조를 찾고자 헌신하였다.

한편 본질을 찾는 능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에서 문제없이 채택하는 능력이다(우린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이 다 어떤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암묵적올 알고 있으며, 책장 사이에 노트북같이 우연하고 우발적인 것이 껴 들어가 있을 때 쉽게 구분해낼 수 있다). 어떤 대상의 본질적 구조를 찾기 위한 형상적 변경은 일종의 상상의 도움을 받는 개념적 분석이지 누구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이 아니다.

또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통찰은 변형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디지털 책이 책으로 간주되어 책의 개념이 달라졌듯이). 그리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연구되는 대부분의 대상들은 본질적인 모호함으로 특징지어지고,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분류와 기술은 본질상 근사치적이기도 하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대상에 정확성과 정밀성을 본질로 부과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이다.

2. 본질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우리의 탐구는 실제로 주어진 것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우리의 탐구 방법은 특정한 과학적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당면한 주제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후설이 “참된 방법은 탐구되어야 하는 사태들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 같이 말이다. 모든 것은 그 영역에 적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환원주의는 대상을 자연과학적 방법과 원리 중 가장 간단한 것으로 환원시키며, 제거주의 또한 자연과학의 방법과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제거해버린다(의식 또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또한 과학적 자연주의는 방법적으로도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도출된 것 만을 참으로 여긴다. 즉, 과학적 환원주의, 제거주의, 과학적 자연주의등 (낯설지 않은 이런 방식들은) 사회학과 인문학 등의 현상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 가치가 없다고 간주해버린다.

정말 그러한가?

결코 그렇게 볼 순 없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생활 세계가 과학에 의해 망각되고 억압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 조차 생활 세계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메를로 퐁티의 주장대로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연과학만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며, 우리의 경험세계는 그 나름의 타당성과 진리가 있으므로 과학의 승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자연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탐구해나가야 한다.

3. 나의 성찰

내가 다루는 간호 현상은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간호 현상을 숫자로만 측정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간호 현상이 가진 풍부한 색깔을 가리는 일이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본질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은 뭔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본질이라고 하면 일단 딱 떨어져야만 할 것 같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간호 현상의 그 모호한 본질을 찾기 위해 자연과학적 방법 뿐 아니라 현상학적 질적연구라는 도구 또한 장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에포케?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3장. 방법론적 고찰)

현상학자 후설은 세계를 밝히기 위해 의식을 탐구하였고, 의식을 단지 세계 내의 일부로 존재하는 한 대상이라기보다 세계에 대한 주체로 간주하였다.

또한 후설은 세계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야만 하며, 이를 위해 우리 의식은 에포케라고 부르는 것을 수행하는 일, 곧 특수한 괄호치기나 판단중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때 무엇을 괄호치거나 판단 중지해야 하는가? 에포케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의견 불일치가 있어왔고, 단 자하비는 3가지 대표적인 오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에포케에 대한 일반적 해석

오해 1.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 사유의 습관, 편견, 이론적 가정이다. 현상학은 대상을 향한 전회이다!

이 관점에서 현상학은 열린 마음으로 대상들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이때 현상학은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descriptive) 과제이며, 현상의 특이성을 존중하기 위해 가능한 세세하게 기술해야 한다.

나도 이것이 에포케라고 배웠다. 대상에 대한 선입견, 편견, 이론적 가정 등을 내려놓는것. 그런데 아니라고?

단 자하비는 이것이 현상학의 일부 특성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나 현상학적 분석의 범위를 적절하게 포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단 자하비에 따르면 현상학은 대상을 향한 전회만을 포함하지 않는데, 오해1의 관점은 대상과 주체 혹은 세계와 마음의 상호 관계나 상관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체계적 야심을 결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상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되, 그것이 우리 의식에 어떻게 경험 되는지에 대한 관계 또한 놓치면 안될 것 같다 (내 생각).

오해 2.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세계의 대상들과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이고 자연적인 집착이다. 현상학은 주체로의 귀환이다!

이 관점에서 현상학은 우리 내면의 경험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양상을 주제화하고 기술하도록 우리의 관심 범위를 넓힌다.

단 자하비는 이 또한 현상학의 일부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나 현상학적 분석의 범위를 적절하게 포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현상학은 주체로의 귀환만을 포함하지 않으나, 이 관점도 대상과 주체 혹은 세계와 마음의 상호 관계나 상관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체계적 야심을 결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그동안 차마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경험을 포착하고 탐색하더라도 그 차원이 세계와의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가지고 있기에 그래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내 생각).

한편 이런 오해도 있다.

2. 의식과 실재

오해 3. 현상학은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며 존재에 대해서 물을 수 없다.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실제로 현존하는 세계다.

이 관점에서는 현상과 사태가 어떻게 나타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실재로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부적절하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단 자하비는 후설은 세계와 참된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몰두하였으므로 에포케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3.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에포케를 하라는 것인가?

단 자하비는 에포케를 “실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특정한 독단적 태도를 중단시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 때 말하는 실재에 대한 독단적 태도는 우리의 전이론적 삶에도 스며들어 있는 자연적 태도, 즉 우리가 경험에서 마주하는 세계가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를 중단하는 것도 포함한다.

실재가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현존한다는 자동적인 믿음을 유보함으로써 실재는 특정 관점에서 드러나고 주제화되며, 처음으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즉, 에포케와 환원은 실재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기보다는 바로 그 실재를 철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에포케를 통해 실재를 더 이상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대상들이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나타내는 대상과 관련된 지향적 작용과 경험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에포케는 초월적 환원을 위한 첫걸음이자, 적극적인 반성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성적 연관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4. 에포케는 후설만의 주장인가?

단 자하비는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가 에포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으나,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 또한 철학적 사유의 태도에 이르는데 필요한 반성적 운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후설의 에포케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5. 나의 성찰

나에게 에포케는 지향적 존재이자 세계-내-존재인 가 의식적으로 결코 분리하기 어려운 현상(대상)을 면밀하고 객관적으로 밝히 드러내기 위하여 나의 일상적인 의식적 습관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사태를 새롭게 바라보려고 하는 의지적 작업으로 해석된다. 맞을까..? 단 자하비는 분명히 최대한 쉽게 설명한 것 같긴 한데, 쉽지 않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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