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광요도재활실 20주년 행사

기분이 좋아서 누웠지만 잠이 잘 안온다. 어제 잠을 설쳤음에도.

고뇌가 사라지니 글이 잘 안써지지만, 그래도 오늘은 기록해둬야지.

심포지엄은 교수님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해주셨다. 그러나 20년을 기념하는 이 심포지엄이 “감사”와 “신의”를 표하는 자리가 되길 바라시는 한교수님의 의중을 알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교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메신저 노릇을 해야겠다 싶었다.

감사하게도 의미있는 분들께서 많이 함께해주셨고, 우리가 표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을 나름 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년사 책자는 정말 뿌듯하다. 부담감은 1년 넘게 가졌으나 정작 스타트가 늦어져서 두달만에 완성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우울감을 경험하게 할 정도로 스트레스받는 과정이었다.

아마 유난히도 많은 환자를 받아내는 방학기간과 겹쳐서 더 부담스러웠던것일수도.. 정말 나자빠지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어쨌든 결과물로 잘 나왔다!

도움이 되는 자료로 쓰여진다면 정말 행복하겠다.

(2019.9.27. 페이스북 기록물)

후설. 논리연구. 5절. 심리학주의의 논리적 근본법칙 해석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5절을 공부하며 정리하였다.

25. *모순율에 대한 밀과 스펜서의 심리학주의적 해석

  • *모순율 [矛盾律, principle of contradiction]: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확립된 논리학의 기본원리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즉 어떤 사물이 같은 대상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A를 하나의 명제로 할 때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며, A의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그 말은 항상 옳지 않다. 따라서, “‘A는 A가 아니다’일 수는 없다” 는 항상 옳은 명제, 즉 논리적 진리의 하나로 된다. 이 진리를 모순율이라고 한다.[출처] 모순율, 동일율, 배중율|작성자 wind0631

밀은 심리학주의적으로 모순율을 경험에서 나온 법칙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모순율을 “믿음과 믿지않음이라는 서로 배척하는 서로 다른 두 정신상태”라는 데서 발견한다

밀은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고, 소음이 있는 곳에는 고요함이 없고, 동등한 곳에는 동등하지 않음이 없고, 앞서감에는 뒤따라감이 없고 등, 어느 하나가 현존하는 곳에서 나머지 다른 하나는 없는 이 첨예한 대립관계에서 모순율이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믿음의 작용들이 우리가 본래의 의미에서 참이나 거짓으로 부를 수 있을 유일한 대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어떻게 명목상 경험의 사실에서 논리법칙의 연관을 수립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편 스펜서는 “의식의 어떤 긍정적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상관적인 부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부정적 양상은 이와 상관적인 긍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밀은 이를 절대적으로 찬성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모순율은 결코 동어반복이 아니며, 모순된 명제의 정의는 그것이 배제된다는 사실을 포함하지 않는다.

26. 원리에 대한 밀의 심리학적 해석은 어떠한 법칙도 산출하지 않고 완전히 모호하고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경험법칙을 산출한다.

그런데 정말 대립된 믿음의 작용이 공존할 수 없는가?

귀납적으로 따져보자. 정말 틀린 추론을 통해 혼란되고 대립된 것을 동시에 참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는가? 그렇다면 그게 법칙인가? 최면상태라면? 열병에 의한 정신착란상태라면?

경험주의자들은 ‘정상적 개인’이나 ‘정상적 사유체제’라는 개념을 들이밀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는 것인가?

밀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 기초가 되는 그 중요한 법칙을 어떤 통찰도 없이 심리학적 메커니즘으로 확신하여, 연상의 맹목적 메커니즘을 지닌 소박한 경험에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는 심지어 실제로 논리학에서 사용되는 그 명제도 아니다.

25와 26의 부록. 경험론의 몇 가지 원리적 결함

경험론과 심리학주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험론의 원리적 결함에 대해 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극단적 경험론은 간접적 인식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고, 그 결과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학문적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다.

극단적 경험론은 결국 경험적 판단만 무비판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간접적 인식이 근거하는 궁극적 원리를 통찰하고자 하는 대신 경험과 귀납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써 더 많은 것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 YJi: 이는 기시감이 있는 대목이다. 질적연구자인 오박사님과의 미팅 시, 박사님은 질적 연구를 통해 본질은 찾는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셨고, 다만 다양한 경험 그 자체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것이 질적 연구자의 몫이라 하셨다. 오박사님은 후설 관점에서는 극단적 경험론자에 가까운 듯..

그런데 그렇다면, 이는 이성적 정당화가 완전히 결여되게 된다. 즉, 경험론의 이론과 학설은 편견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자의적 가정이 되고 말 뿐이다.

27. 논리적 원리를 그 밖의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유사한 반론. 기만의 원천인 애매함.

논리적 법칙의 통찰성은 확고하지만, 그 법칙의 사유내용을 심리학적 사유내용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그 법칙은 즉각 애매해진다.

올바른 사유에서 논리적으로 ‘예’와 ‘아니오’는 명백하게 배척된다. 하지만 이것을 심리학적 명제로 바꾸는 순간, ‘예’와 ‘아니오’의 공존 불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

필증적 명증성을 규정함에 있어 모순은 함께 존속할 수 없다.

28. 사유의 자연법칙으로 파악하는 동시에 이 법칙을 논리적으로 규제하는 규범법칙으로 파악할 수 있을 모순율의 추정적 양면성 (독해가 어려운 꼭지)

현대의 대부분의 독일 논리학자는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사유법칙’의 본질을 밝히려고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순율을 자연법칙이자 규범법칙이라고 주장하고자 하고 있다. 특히 랑에는 모순율을 사유의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이 만나는 점이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호한 경험적 일반성과 논리학에서의 절대적으로 정밀하고 순수한 개념적 법칙은 혼동되어선 안된다.

29. 계속. 지그바르트의 학설 (독해가 어려운 꼭지)

한편 지그바르트는 모순율을 “하나의 자연법칙이었고, 단지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규범법칙의 의미로만 등장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어, 자연법칙일 때 그 원리는 ‘a가 b이고 a가 b가 아니다’를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할 뿐인 반면, 규범법칙일 때 그 원리는 의식 일반의 통일성이 두루 퍼져 있는 불변하는 개념의 범위 전체’에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명제가 어떻게 자연법칙의 성격을 띌 수 있는가? 모순율이 ‘부정하다는 것’의 의미 속에 정초한다면,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와 같이 공식화하여 표현한 자연법칙의 사유내용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5절 감상평

아… 뭔가 잘못됐다.. 이 챕터를 읽기 시작했던 게 4월 19일 인데, 그동안 인터뷰하고 녹취록 정리한답시고 한 20여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더니 글이 아예 안 읽힌다.

어쨌든 논리학자들이 모순율을 대하는 자세를 비판하며,

논리법칙의 근간을 경험적인 것에 두려는 모든 시도는 꺼져~

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뒤에 챕터 읽고 다시 읽으면 좀 더 이해가 될까.. 좀 더 읽어보고 다시 와야겠다.

아 후설.. 왜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나에게 현상학적 질적연구란 (2): 인터뷰 대상자 모집하기

학위 논문 연구계획서에 대한 IRB 승인 이후, 본격적으로 인터뷰 대상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두 명을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진행했고, 두 명의 인터뷰 날짜를 추가로 잡아 놓은 상태이다.

인터뷰를 진행한 첫 두 분은, 나의 인터뷰 요청에 바로 흔쾌히 응해주셨다. 이미 어느 정도 라포가 형성되었던 분들이라 그런지, 정말 기꺼히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특히 “전 당연히 해야죠” 라는 말씀과 함께, “전 언제나 선생님을 지지해요.”라고 해주신 첫 번째 대상자의 격려는 연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 네번째 요청까지는.. 너무 감사하게도 바로 수락을 해주셨다.

그런데 다섯번째부터 약간의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어려움, 육아로 인해 쉽게 빼기 어려운 시간..등이 인터뷰의 장애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불편함.

난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듣자마자 알 것도 같았다.

나의 인터뷰가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일이 된다면.. 절대 안될 것이다. 거절 사유를 명확하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분들이 정말 큰 용기와 에너지를 내어주신다는 것이란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육아로 인해 쉽게 빼기 어려운 시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연구계획서를 보여드렸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두 개의 사례는 나 자신을 좀 반성하게 만들고 있다. 내가 대상자들에게 그 동안 더 잘 했다면 좀 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윤리적이게 한답시고, “참여하지 않으셔도 전혀 상관 없어요.”를 너무 강조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야.. 해야 할 말이긴 했지.. 아니 그래도 너무 강조했나.. 아니야. 그래도 말했어야 했어.

————- 뭔가 거절에 가까운 이 상황은 나를 좀 위축되게 하기도 한다. 뭔가 앞으로 연구 참여를 권하는 입 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것만 같은 이 기분.

아직 시간 있어.. 조급하지 말자. 아직 두 명이나 인터뷰 예정이고, 아직 대답이 없으신 두 분은 조만간 병원에 오시니..그 때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려봐야겠다.. 그 때까지 기도나 해야겠다..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려본다.

지금 한 명 한 명의 인터뷰가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대상자 모집이 잘 되는 것이 너무 간절하다.

의미있는 연구를 위해, 대상자의 마음을 열어주옵소서.. 아멘..

ESPU 2015 in Prague.

ESPU 2015 in Prague.
진심으로 만족스러웠던 학회였다.

무엇보다도 ESPUN과 ICCS meeting.

세계 각국의 소아비뇨기과에서 주체적으로 클리닉을 이끄는 많은 간호사들의 경험과 연구 결과들을 듣는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자극과 영감이 되었다. 그동안의 한국과 아시아태평양 소아비뇨기과학회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간이었다.(우리 병원 간호사선생님들이 단연 독보적으로 경쟁상대가 없었으니.. )

그리고 언젠가는 ESPUN과 ICCS에서도 영향력있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다. 10년 후쯤엔 앞에서 좌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음에 또 ESPU에 오고 싶고, 그때는 명함들을 좀 받아놔야지.. 끝나고 나니 그게 제일 아쉽다. 적극적으로 말 좀 걸어볼걸…커피 브레이크를 왜이렇게 허무하게 보냈을까 하고 말이다.
정말 진심으로 또 오고 싶다~!!!

여기가 꼭 프라하여서만은 아니다. ㅎㅎ

THANKS TO 여기 오게 해주신 한상원교수님, 초록제공해주신 최은경선생님, 접수 권유해주신 Young Jae Im 임영재교수님, 이용승교수님으로부터 지윤혜 간호사 잘 챙기라는 지령을 받고 오셨다지만 그것 이상으로 열심히 챙겨주신 김상운 교수님, 지병훈 선생님(덕분에 진짜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프라하 제대로 즐겼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아름다운 유럽으로 장기간 떠나보내고 한국을 홀로 외롭게 지키고 있는 내 든든한 빽 김성동. 공부해야할 땐 내리 비를 내리시더니 여행하고자 한 날엔 맑은 하늘을 허락하신 세심하신 하나님 ㅎㅎ 감사합니다~!!♥

(2015.10.18. 페이스북 기록물)

간호인력개편안을 바라보며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본다.

  1. 현 정규 간호사의 병동 업무를 돌아보면, 한명의 간호사는 10명 가까운 환자(때로는 15-6까지도)의 의사 처방을 수행하느라 정신 없다. critical 한 판단이나 질적인 간호를 제공할 여유가 전~~ 혀 없다. 우리가 대학에서 배운 질적인 간호를 실현하기엔 너무 열악한 현실이다. 간호인력은 반드시 늘어나야 한다. RN 양성에는 한계가 있으니, 미국에서는 LPN과 NA가 함께 일한다.

RN : registered nurse
LPN : licenced practical nurse
NA : nurse aide

  1. 미국은 RN, LPN, 그리고 NA가 있다. RN은 환자를 간호할 때 우선순위를 판단하고 critical하게 문제를 사정해낼수 있는 리더십 집단이다. LPN은 간호 술기를 구사할 수 있어 소위 말하는 acting을 하는 집단이다. NA는 간호술기는 행하지 못하지만 환자의 간호를 위해 필요한 의식주 전반을 돌보는 집단이다.
  2. 실제로 질적인 간호를 제공하기 위해 RN, LPN, NA는 한 팀을 이루어 움직인다. RN은 리더이다. 많은 간호술기들이 LPN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RN의 책임 아래에서 RN의 판단하에 위임된 업무이다. 모든 책임은 RN에게 있다.
  3. 미국에서 LPN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시간의 교육과 실습을 마치고 NCLEX-PN이라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 시험은 NCLEX-RN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이 동일하게 주관하며, RN 시험과 같은 강도를 지닌다. 다만, RN에게서는 우선순위, 판단력,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항목이 추가되어 있다. 그 외에 기본 간호 지식에 대한 강도는 동일하다.
  4. 그래. 좋다. 이름을 바꿔 존재감을 높이는 것, 조금 더 합법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 다 좋다. 다만, 그만큼 공부해야 한다. 그만큼 실습해야 한다. 그리고 당당히 ‘면허’를 획득해야 한다. 그리고 ‘간호사 책임 아래’ 간호 술기를 해야 할 것이다. 진짜 LPN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역할과 영역은 정말 NA와 같다. 진짜 자격을 갖추어라.
  5. 경력만으로는 자격과 면허를 줄 수 없다. 이건 생명을 대하는 일이다. 분명한 ‘면허 시험’과 그 시험을 이수하기 위한 ‘교육 과정’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시되어야 한다.
  6. 이수한 교육과정 종류에 따른 업무의 종류와 역할도 분명히 달라야 한다. LPN은 RN의 감독하에, NA는 RN과 LPN의 감독 하에 환자를 간호해야 할 것이다. 이 원칙은 무너져서는 절대 안된다. 환자를 가장 가까이서 돌보는 간호사의 판단력이 절대로,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7.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역할의 재분배이다. 더 나은 질적 간호를 위한 고민이다. Acting하느라 critical하게 질적 간호를 제공하지 못했던 RN들에게는 이러한 개편 방향이 바른 방향으로 향한다면 간호 술기를 대신 해줄 분신들을 만드는 방법일 수도 있다. RN의 책임 및 위상을 높일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다.
  8. 위에서 계속 강조하듯이 교육과정에 따른 역할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면’ 함께 고민해 볼 일이다.
  9. 법을 만드실 분들.. 부디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지금의 안은 상식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계속 고민해주길 바란다. 바로 여러분이 병원에 누워있을 때, 어떤 간호를 받을 것이냐의 문제이다.
  10. 난 그래도 결국 정부가 바른 판단을 할거라 믿는다.

(2013.04.16. 네이버 블로그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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