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2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목차
13.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관한 논쟁
앞서 논의한 것과 같이 논리학은 실천적 성격을 띈 기술학이라고 정당화 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논리학의 기술적 성격에 대해 부인하는 입장이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칸트는 우리가 올바로 *오성을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 임무를 맡은 응용논리학에 대해 이야기 했다.
- *(칸트의) 오성: 감성 및 이성 다른 두 능력에 대비하여 대상을 구성하는 개념 작용의 능력인 지력 –>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생긴다.’
여기서 응용논리학은 오성(개념 작용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응용논리학을 한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완전한 독립학문으로, 순수이론적 학문으로 현존시켰다.
결국 두 가지의 입장이 대치되게 된다.
- 기술학으로 파악된 모든 논리학은 고유한 이론적 학문, 즉 ‘순수논리학’을 기초로 한다 (칸트, 헤르바르트, 베인, 드로비슈 등).
- 논리적 기술학 속에서 확인되는 모든 이론적 학설은 타 학문에 포함된다. 즉 그 자체적으로 근거하는 고유의 이론은 없다 (베네케, 밀, 지그바르트 등)
이 두 가지의 입장은 모두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무엇이 맞는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앞서 논의하였듯이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학문 자체에 대한 논쟁이며, 그러한 논쟁이 있음은 그 학문이 아직 불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규범적 학문의 개념. 규범적 학문에 통일성을 주는 근본척도 또는 원리
잠시 규범적 학문이란 무엇인지 따져보자.
규범이란 실재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더라도,’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위해 우린 여러 종류의 규범적 명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너는 내 말에 따라야만 한다’, ‘군인은 용감해야만 한다’, ‘인간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등등). 이 규범적 명제에서는 어떤 부류의 대상에 대해 일정한 의미에서 ‘좋은'(가치 있는) 또는 ‘나쁜'(무가치한)의 개념이 생기는 가치 태도를 전제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태도에서 우리는 ‘더 좋은’과 ‘가장 좋은’, 그리고 ‘더 나쁜’과 ‘가장 나쁜’ 등을 구별하며 무엇이 그러한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에 대해 더 가까운 조건이고, 먼 조건인지, 혹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인지 등을 따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그 가치를 최대로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는 규범적 명제를 가질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근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들어 칸트 윤리학의 ‘정언명법’, 혹은 공리주의자의 윤리학에서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등이 이에 해당 된다. 이 때 이 근본 규범은 어떤 것이 규범화 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해줄 뿐, 어떤 규범적 명제도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때 이 근본 규범의 총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목표를 세운다면, 그것은 규범적 분과의 이념이 생긴다.
즉, 각각의 규범적 학문은 자신의 고유한 근본 규범을 갖고, 이 근본 규범은 그때그때 규범적 분과의 통일원리를 서술한다.
15. 규범적 분과와 기술학
특히 우리는 실재적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관심이 있으므로, 규범적 분과의 개념을 기술학의 개념과 동일하게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모든 기술학은 규범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술학은 근본 규범이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의 특수한 경우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학은 실천적이지 않은 분과 또한 포함한다. 왜냐하면 기술학의 과제는 실천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목적을 다룬다기보다, 우선 실현할 수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규범을 확립하는데 더 좁은 과제가 해결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적 가치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변하는 모든 규범적 분과는 기술학으로 확장된다.
16. 규범적 분과의 기초인 이론적 분과
근본규범(또는 근본가치, 궁극적 목적)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분과들의 통일을 규정한다. 또한 근본규범은 규범화하는 생각을 그 분과의 모든 규범적 명제로 갖고 들어온다. 그러나 근본규범에서 측정한다는 이러한 공통적 생각 이외에 이 규범적 명제는 다른 명제와 구별되는 고유한 이론적 내용을 갖는다. 각각의 규범적 명제는 규범(Norm)과 규범화된 것(Normiertes) 사이의 측정하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형식의 모든 규범적 명제는 오직 ‘B인 A만이 C의 성질을 갖는다’는 이론적 명제를 포함한다.
- YJi: 예를 들어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전인적인 간호만이 진정한 간호이다’라는 간호학의 이론적 명제를 포함하며, 여기서 ‘진정한 간호’라는 새로운 명제는 순수 이론적 명제이고, 어떤 규범화하는 판단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C자체에 대한 가치 태도가 생기면, 그에 따라 ‘오직 B인 A만이 좋은 것이다’,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규범적 형식을 받아들일수 있다.
- YJi: 즉, ‘진정한 간호’라는 명제에 대한 가치태도가 생길 때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규범적 형식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C의 존재는 규범적 학문의 명제 속에 끼워져 있는 이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일정한 이론적 학문 속에서 논리적 자리를 가져가야만 한다.
따라서 규범적 학문이 자신의 명칭에 걸맞아야하면, 규범화할 수 있는 사태와 근본규범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규명해야 하면, 규범적 학문은 이러한 관계의 이론적 핵심내용을 반드시 연구하고 그래서 관련된 이론적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모든 규범적 분과는 어떤 규범도 아닌 진리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규범적 학문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는 어떠해야 하는가?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2절 감상평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 우리는 1절에서 논리학이 기술학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기술학인 논리학은 그만의 독립적인 이론적 기틀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학문을 기틀로 하는가?
- 앞서 논의하였듯이 논리학은 규범적이라 한 것을 짚어보면, 규범적인 학문은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 고유한 근본규범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체를 이룬다. 따라서 그 근본규범은 일정한 이론적 체계 내에 있어야 한다.
뭐 이런 뜻인 것 같다. 누가 동화책같이 써둔 것은 없을까? 독해가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