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5절을 공부하며 정리하였다.
25. *모순율에 대한 밀과 스펜서의 심리학주의적 해석
- *모순율 [矛盾律, principle of contradiction]: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확립된 논리학의 기본원리로 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즉 어떤 사물이 같은 대상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A를 하나의 명제로 할 때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며, A의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그 말은 항상 옳지 않다. 따라서, “‘A는 A가 아니다’일 수는 없다” 는 항상 옳은 명제, 즉 논리적 진리의 하나로 된다. 이 진리를 모순율이라고 한다.[출처] 모순율, 동일율, 배중율|작성자 wind0631
밀은 심리학주의적으로 모순율을 경험에서 나온 법칙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모순율을 “믿음과 믿지않음이라는 서로 배척하는 서로 다른 두 정신상태”라는 데서 발견한다
밀은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고, 소음이 있는 곳에는 고요함이 없고, 동등한 곳에는 동등하지 않음이 없고, 앞서감에는 뒤따라감이 없고 등, 어느 하나가 현존하는 곳에서 나머지 다른 하나는 없는 이 첨예한 대립관계에서 모순율이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믿음의 작용들이 우리가 본래의 의미에서 참이나 거짓으로 부를 수 있을 유일한 대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어떻게 명목상 경험의 사실에서 논리법칙의 연관을 수립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편 스펜서는 “의식의 어떤 긍정적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상관적인 부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부정적 양상은 이와 상관적인 긍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밀은 이를 절대적으로 찬성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모순율은 결코 동어반복이 아니며, 모순된 명제의 정의는 그것이 배제된다는 사실을 포함하지 않는다.
26. 원리에 대한 밀의 심리학적 해석은 어떠한 법칙도 산출하지 않고 완전히 모호하고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경험법칙을 산출한다.
그런데 정말 대립된 믿음의 작용이 공존할 수 없는가?
귀납적으로 따져보자. 정말 틀린 추론을 통해 혼란되고 대립된 것을 동시에 참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는가? 그렇다면 그게 법칙인가? 최면상태라면? 열병에 의한 정신착란상태라면?
경험주의자들은 ‘정상적 개인’이나 ‘정상적 사유체제’라는 개념을 들이밀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는 것인가?
밀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 기초가 되는 그 중요한 법칙을 어떤 통찰도 없이 심리학적 메커니즘으로 확신하여, 연상의 맹목적 메커니즘을 지닌 소박한 경험에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는 심지어 실제로 논리학에서 사용되는 그 명제도 아니다.
25와 26의 부록. 경험론의 몇 가지 원리적 결함
경험론과 심리학주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험론의 원리적 결함에 대해 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극단적 경험론은 간접적 인식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고, 그 결과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학문적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다.
극단적 경험론은 결국 경험적 판단만 무비판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간접적 인식이 근거하는 궁극적 원리를 통찰하고자 하는 대신 경험과 귀납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써 더 많은 것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 YJi: 이는 기시감이 있는 대목이다. 질적연구자인 오박사님과의 미팅 시, 박사님은 질적 연구를 통해 본질은 찾는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셨고, 다만 다양한 경험 그 자체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것이 질적 연구자의 몫이라 하셨다. 오박사님은 후설 관점에서는 극단적 경험론자에 가까운 듯..
그런데 그렇다면, 이는 이성적 정당화가 완전히 결여되게 된다. 즉, 경험론의 이론과 학설은 편견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자의적 가정이 되고 말 뿐이다.
27. 논리적 원리를 그 밖의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유사한 반론. 기만의 원천인 애매함.
논리적 법칙의 통찰성은 확고하지만, 그 법칙의 사유내용을 심리학적 사유내용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그 법칙은 즉각 애매해진다.
올바른 사유에서 논리적으로 ‘예’와 ‘아니오’는 명백하게 배척된다. 하지만 이것을 심리학적 명제로 바꾸는 순간, ‘예’와 ‘아니오’의 공존 불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
필증적 명증성을 규정함에 있어 모순은 함께 존속할 수 없다.
28. 사유의 자연법칙으로 파악하는 동시에 이 법칙을 논리적으로 규제하는 규범법칙으로 파악할 수 있을 모순율의 추정적 양면성 (독해가 어려운 꼭지)
현대의 대부분의 독일 논리학자는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사유법칙’의 본질을 밝히려고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순율을 자연법칙이자 규범법칙이라고 주장하고자 하고 있다. 특히 랑에는 모순율을 사유의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이 만나는 점이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호한 경험적 일반성과 논리학에서의 절대적으로 정밀하고 순수한 개념적 법칙은 혼동되어선 안된다.
29. 계속. 지그바르트의 학설 (독해가 어려운 꼭지)
한편 지그바르트는 모순율을 “하나의 자연법칙이었고, 단지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규범법칙의 의미로만 등장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어, 자연법칙일 때 그 원리는 ‘a가 b이고 a가 b가 아니다’를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할 뿐인 반면, 규범법칙일 때 그 원리는 의식 일반의 통일성이 두루 퍼져 있는 불변하는 개념의 범위 전체’에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명제가 어떻게 자연법칙의 성격을 띌 수 있는가? 모순율이 ‘부정하다는 것’의 의미 속에 정초한다면,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와 같이 공식화하여 표현한 자연법칙의 사유내용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5절 감상평
아… 뭔가 잘못됐다.. 이 챕터를 읽기 시작했던 게 4월 19일 인데, 그동안 인터뷰하고 녹취록 정리한답시고 한 20여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더니 글이 아예 안 읽힌다.
어쨌든 논리학자들이 모순율을 대하는 자세를 비판하며,
논리법칙의 근간을 경험적인 것에 두려는 모든 시도는 꺼져~
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뒤에 챕터 읽고 다시 읽으면 좀 더 이해가 될까.. 좀 더 읽어보고 다시 와야겠다.
아 후설.. 왜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