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과정이 좋아요

전 박사 과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박사 과정이라는 과업 덕분에 인생이 너무 바쁘지만, 덕분에 인생이 조금 더 윤택해진다고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일단 재밌습니다. 공부를 조금씩 더 ‘잘’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요기서 공부를 잘 한다는 건, 성적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성적은 원래 좋기도 했고.. ㅋ)공부하는 기술이 늘어간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알고자 하는 지식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그 기술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지식들을, 병원 현장에서 직접 환자를 간호하는데 조금씩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습니다.

현실과 이론, 혹은 현실과 연구간의 차이를 발견해보고, 왜 그런일이 생겼는지 고민할 수 있는것도 즐겁습니다.

그런 고민 끝에 결국 환자를 위한 산물이 나올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 매우 오랜시간동안, 그러니까  제가 석사과정을 할 때까지만 해도  “도대체 언제까지 배울건데?? 도대체 언제 배운걸 남 줄건데?” 라는 자조섞인 내적 질문에 한심스러워 하기도 했었습니다.

마치 취미처럼 계속 공부는 하고 있지만, 진짜 환자에게 배운걸 잘 주지는 못하고 계속 자기발전만 하는 것 같아서, 수준에 안맞게 사치부린다 싶어 괴로웠던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박사과정을 하면서는, 이제는 배운걸 주고 있고, 앞으로 더 제대로 줄 수 있을 것 같아 매우 기대되고 즐겁습니다.

박사과정, 재미있습니다^^

(2023.3.28. 티스토리 블로그 기록물)

박사. 선명한 음질을 위하여.

2020 9월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2005 대학입학
2010 병원취직
2015 석사과정시작
2020 박사과정시작

그러고보니 뭔가 딱 맞아떨어진다.

오늘 그 첫 행보를 걷기 시작했는데, 박사과정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소리. 스피커.

얼마전 김동호 목사님께서 우리교회에 오셔서 세레요한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표현된 것에 대한 감동을 말씀해주신적이 있다. 세례 요한은 스피커였고, 본질은 예수그리스도였다는 것.

나도 아마 선명한 음질의 스피커로 닦여지기 위해 박사 과정을 밟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 목소리가 아니라, 스피커가 필요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주기 위한 스피커. 지금까지의 삶의 인도하심을 생각할때.. 그럴 것 같았다.

아직 그 과정을 본격적으로 밟은게 아니라 얼마나 험란하고 고될지 상상이 안되지만, 주께서 나를 그리 쓰시려거든, 그리고 내가 그에 맞게 준비가 되어있거든, 지혜와 명철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할수밖에. 그리고 쓰시도록 의탁해야겠지.

서우도 엄마가 공부하고 늦게들어올 날이 생긴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주변에 도와주시는 정말 많은 분들의 마음과 헌신에 감사하며 열심히하리!!

(2020.08.15. 페이스북 기록물)

간호학의 현상학적 연구 현황에 대하여(논문 리뷰)

질병 체험에 대한 간호 현상학적 탐구 현황을 분석하여 한글로 발행된 논문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발행된 지 6년 정도 경과하긴 하였지만 이런 리뷰 연구가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다(감사합니다. 고문희 교수님).

본 연구의 저자는 대부분의 간호학 관련 저널을 포함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인 CINAHL full text를 활용하여, 2006년 1월부터 10년간 ‘현상학(phenomeno*)’ 및 ‘체험(lived experience)’을 주제어로 하여 문헌 검색을 하였고, 그 결과 질병 체험 연구는 121편으로 확인되었다. 이 질병체험은 1)투병 당사자의 경험, 2)돌봄 제공자의 경험, 3)의료인의 경험, 4)제 3자의 경험 등으로 분류되었고, 저자는 이 중 투병 당사자의 직접적 질병체험이 다뤄진 62편을 분석하였다.

간호학의 현상학적 질병 체험 연구 동향 분석 결과

1. 탐구된 체험의 질병 유형으로는 만성질환이 가장 많았다.

이는 만성질환의 탐구 현상의 범위가 넓고,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러다보니 연구 참여자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일 것으로 해석되었다.

2. 자료 수집 방법

주요 자료수집 방법은 목적 표집 모집, 반구조화 심층면담, 녹음 및 필사로 확인되었다.

3. 연구 참여자 수는 8명 전후가 가장 많았다(최소-최대: 3-20).

저자는 샘플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력, 즉 많은 정보보다는 한 사람의 적절하고 풍부한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분석한 문헌 중 샘플이 ‘포화’되었음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포화’라는 개념은 근거이론 연구에 합당하므로 현상학적 연구에서는 신중하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하였다.

4. 연구 접근 방법

연구 접근 방법은 van Manen(17편) > Smith의 IPA(10편) > Giorgi(5편)=Colaizzi(5편) 순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여러 학자를 혼합하여 사용하거나, 특정 지침 없이 ‘하이데거 버전의 현상학’ 등으로 제시된 경우도 있었다.

5. 연구 접근 방법에 따른 철학적 기반

철학적 기반에 대한 분석 결과, 연구 접근 방법에 따른 일관된 철학적 전통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van Manen을 활용한 경우는 주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전통을 주요 기반으로 제시하였고, Giorgi의 경우 후설, Colaizzi의 경우 후설과 하이데거를 제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어떠한 철학적 배경도 제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며, 철학적 기반을 제시한 수준 또한 차이가 컸다.

6. 연구 진실성(엄밀성)

연구 진실성 확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며, 가장 많이 제시된 것은 Lincoln과 Guba의 기준(7편)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기준이 실제로 현상학적 연구의 기준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므로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제언하였다. (예를 들어 후기 실증주의자의 경우에는 삼각검증, 참여자 확인, 감사 등의 체계적 방법 선택 / 구성주의적 입장이라면 오랜기간의 관여, 심층적이고 풍부한 기술 / 비판적 관점이라면 성찰 및 동료 검증 등을 고려할 수 있다).

한편, 현상학적 환원을 언급한 경우는 11편이었으며, 다양한 목적과 수준으로 제시되었다. ‘환원’에 대한 이의가 있는 경우에서 환원 대신 ‘해석학적 반성’을 방법으로 채택한 경우도 있었다.

7. 제한점

저자는 본 연구의 제한점으로, 질병 체험의 본질적 주제 및 사실적 구조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고되었는지는 분석하지 못했고, 상호주관적 체험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도 탐색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상학적 연구의 전반적인 동향을 분석하여 간호학의 현상학적 탐구의 현황 및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줄 정리를 해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간호학자들이 현상학적 연구에 진지하고 충직하게 헌신하는것은 돌봄 대상자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아름다운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돌봄 제공 전문직의 여러 분야에서 현상학적 접근의 연구가 증가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어렵지만, 현상학의 근본이념과 뿌리를 알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을 통해 간호학에서의 현상학에 대한 오해와 오류의 덩굴을 정리해가야 할 것이다(고문희).

참고문헌

고문희. (2018). 질병체험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의 현황. 대한질적연구학회지, 3, 20-30.

나에게 현상학적 질적연구란 (2): 인터뷰 대상자 모집하기

학위 논문 연구계획서에 대한 IRB 승인 이후, 본격적으로 인터뷰 대상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두 명을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진행했고, 두 명의 인터뷰 날짜를 추가로 잡아 놓은 상태이다.

인터뷰를 진행한 첫 두 분은, 나의 인터뷰 요청에 바로 흔쾌히 응해주셨다. 이미 어느 정도 라포가 형성되었던 분들이라 그런지, 정말 기꺼히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특히 “전 당연히 해야죠” 라는 말씀과 함께, “전 언제나 선생님을 지지해요.”라고 해주신 첫 번째 대상자의 격려는 연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 네번째 요청까지는.. 너무 감사하게도 바로 수락을 해주셨다.

그런데 다섯번째부터 약간의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어려움, 육아로 인해 쉽게 빼기 어려운 시간..등이 인터뷰의 장애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대한 불편함.

난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듣자마자 알 것도 같았다.

나의 인터뷰가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일이 된다면.. 절대 안될 것이다. 거절 사유를 명확하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분들이 정말 큰 용기와 에너지를 내어주신다는 것이란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육아로 인해 쉽게 빼기 어려운 시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연구계획서를 보여드렸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두 개의 사례는 나 자신을 좀 반성하게 만들고 있다. 내가 대상자들에게 그 동안 더 잘 했다면 좀 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말이다.

윤리적이게 한답시고, “참여하지 않으셔도 전혀 상관 없어요.”를 너무 강조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야.. 해야 할 말이긴 했지.. 아니 그래도 너무 강조했나.. 아니야. 그래도 말했어야 했어.

————- 뭔가 거절에 가까운 이 상황은 나를 좀 위축되게 하기도 한다. 뭔가 앞으로 연구 참여를 권하는 입 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것만 같은 이 기분.

아직 시간 있어.. 조급하지 말자. 아직 두 명이나 인터뷰 예정이고, 아직 대답이 없으신 두 분은 조만간 병원에 오시니..그 때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려봐야겠다.. 그 때까지 기도나 해야겠다..하고 다시 마음을 추스려본다.

지금 한 명 한 명의 인터뷰가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대상자 모집이 잘 되는 것이 너무 간절하다.

의미있는 연구를 위해, 대상자의 마음을 열어주옵소서.. 아멘..

나에게 현상학적 질적연구란 (1): 심층인터뷰를 앞두고

현상학적 질적연구 심층인터뷰를 앞둔 기대감

드디어 박사과정 연구계획서의 IRB 승인을 받아 심층인터뷰에 돌입하게 되었다.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현상학적 질적연구를 위한 인터뷰가 시작되는데, 정말 무척이나 기대된다. 왜냐하면 이 과정은 나를 제대로 훈련 시킬 기회이기 때문이다. 간호사로서 대상자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을 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간호사에게 현상학적 관점이 왜 중요한가

난 현상학을 공부하면서 현상학이야 말로 간호사들이 알아야 할 철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간호사는 대상자의 “삶”을 돌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여러가지를 훈련받는다. 해부생리, 병태생리, 약리 등 지식적인 것 & 주사, 드레싱 등 임상에서 필요한 술기 등 뿐 아니라 대상자와 의사소통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 까지도 훈련받는다.

대상자와의 의사소통은 나의 대상자를 잘 돌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하다. 숙련된 간호사라고 하여 대상자의 표정만 보고, 몸짓만 보고, 그의 필요를 다 알아차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만약 간호사가 현상학적 관점을 장착하고 대상자와 의사소통을 한다면, 그에게 정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현상학적 관점은 짧게 정리해보자면, 1)내가 이미 나의 대상자가 경험하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한 나름의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잠시 그것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내려놓고, 2) 실제로는 그 근거가 구축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대상자의 경험 그 자체에 진정성 있게 다가가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린 Evidence based 된 실무(근거-기반 실무)를 하도록 훈련받았다.

이는 우리가 간호를 수행할 때 이미 확인된 구체적인 근거에 따라 간호를 제공함으로써, 대상자에게 가장 효과적방식을 자신 있게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이 evidence는 우리 ‘간호 실무’의 과학적 근거이며, ‘간호학’ 존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Evidence-based practice는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그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면, 나름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나의 대상자 그 자체는 간과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바일 헬스케어라는 방식이 자가관리에 도움이 된다라는 근거가 축적됨에 따라, 대상자에게 모바일 헬스케어 프로그램을 권하였다고 치자.그런데 대상자는 좀처럼 그걸 사용도 안하고, 자가 관리는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그럼 일단 그 대상자는 compliance가 낮은 대상자로 규정 되기 쉽다.

그런데 그 대상자가 알고 보니 자기 핸드폰이 없다거나, 학교에 있을 때는 핸드폰을 꺼놔야 한다거나, 핸드폰으로 통해 노출되는 특정 이미지나 문구가 신경쓰여서 밖에서는 어플을 킬수 조차 없었다거나, 헬스케어를 한다고 핸드폰을 켰다가 다른 게임에 눈이가서 그 게임만 했다거나, 손가락이 너무 두꺼워서 제대로 터치를 못했다거나, 핸드폰 알림 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거나, 이런것까지 해야하나하고 자기비관속에 있다거나.. 등등등.. 너무나도 많은 주관적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현상학적 관점을 장착한 의사소통은 앞서 언급 하였듯이 나의 대상자가 그 경험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경험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때 이미 과학적으로 효과적이라고 판명된 근거들은 잠시 괄호 안에 묶어둔다. 이건 결코 그 근거가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오롯이 나의 관심을 과학적 근거보다 대상자의 경험, 대상자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에 맞추려는 의지적인 태도변경이다. 이미 확인된 근거를 대상자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그 다음 스텝이 된다.

대상자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대상자를 단순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오직 ‘근거 중심 간호’만의 강조일 수 있다.

간호가 예술이자 과학이라면, ‘근거-중심 간호’ 만큼 ‘대상자 경험-중심 간호’라는 구호가 함께 가야 할 것라고 생각한다.

현상학적 관점 장착 의사소통 트레이닝의 기회

하지만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는 임상 속에서, 대상자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 탐색해 볼 기회는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나름의 공식적인 연구 기회를 통해 의지적으로 현상학적 관점을 장착하여 심층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엄청난 의사소통 훈련과정이지 않겠는가?

난 이 과정이 결국 나에게 효과적으로 현상학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기술을 체화시켜줘서 언젠가는 바쁜 현장에서도 바로바로 발휘할 수 있는 테크닉이 되지 않을까..라는 나름의 기대가 있다. 아자아자아자리~

후설. 논리연구. 4절. 심리학주의의 경험론적 귀결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4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21. 심리학주의자의 관점과 그 논박에서 두 가지 경험론적 귀결의 특징

심리학은 사실 학문이며 경험에서 나온 학문이라는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심리학이 정밀하다기 보다는 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심리학의 법칙이 정밀성을 결여했다면, 그리고 논리학이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다면, 논리학도 모호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논리법칙은 절대적으로 정밀한 것이 아닌가?
  • 혹시 심리학이 정밀한 자연법칙에 근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심리학이 어떤 법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방법은 개별적 사실에서 귀납 하는 것 뿐인데, 이는 정밀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높은 개연성’만 정초하지 않는가?정당화 된 것은 개연성이지 법칙이 아니다.

물론 심리학 등을 포함하는 사실 과학은 그 과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든 법칙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여러 가능성들이 그 사실 과학 내에서 충분히 용인된다.

하지만 이렇듯 사실과학에서 정당한 “가능성”은 논리학에서는 “불합리”할 뿐이다.

22. 고립되어 작동해 이성적 사유를 일으키는 추정적 자연법칙인 사유법칙 (독해하기 어려운 꼭지)

인간은 사유하는 자이며 이는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인간의 올바른 사유 작용을 정의하는 적합성의 본질은 어떤 심리적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곳에 놓여있어야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개연성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사유법칙은 어떤 것도 확실한 것으로 판정할 수 없다.

또한 ‘판단’ 자체와 ‘판단의 내용’으로서의 법칙은 엄연히 다르다. 즉 법칙과 법칙에 대한 인식작용은 다르다.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은 다르다!

논리 법칙이 사유를 인과적으로 지배한다고 하여, 이를 사유작용의 인과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리학주의 논리학자는

  •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은 다르고
  • 규범화하는 규제와 인과적 규제는 다르며
  • 논리적 필요성과 실재적 필연성도 다르고
  • 논리적 근거와 실재적 근거도 다르다

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23. 심리학주의의 세 번째 귀결과 그 논박

  • 논리법칙이 그 인식의 원천을 심리학적 사실성에 가진다고 주장하는가?

이는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만약 논리법칙이 심리학적 사실을 규범적으로 전환한 것이라면, 논리법칙 자체가 심리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인데, 어떠한 논리법칙도 ‘사실의 문제’를 함축하지 않고, 어떠한 인식현상도 함축하지 않는다.

당연히 경험적 법칙은 사실의 내용을 갖으며, 사실에 관한 법칙일 뿐 아니라 사실의 현존도 포함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인식의 척도에 따라 이론적으로 정초된 최고 권위를 지닌 개연성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순수논리법칙은 절대적 정밀함 속에 명료하게 정초되며, 명백하게 모호한 부분을 지닌 개연성에 정초하지 않는다. 논리 법칙은 실질적으로 한정된 영역 안에 적용되지만,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진리로 작동한다.

24. 계속

이런 논리법칙은 경험적으로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논리 법칙은 경험에 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 논리법칙이 귀납적이진 않다. 우리가 사태를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귀납이 필요하지 않고, 귀납의 불완전함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저 책상의 3권의 책이, 저 서랍장의 2권의 책보다 많다는 사실. 귀납의 불완전함은 어디에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심리학적 종속성은 심리적 연관에 관계하고, 시간적으로 규정이 되지만, 논리적 법칙은 명백히 근거와 결론의 객관적 관계에 따르고, 시간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린 이념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의 근본적 차이, 그리고 이에 따른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4절 감상평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약간 이해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수의 법칙으로 논리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가 쉬웠다.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법칙을 생각해보자.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사실은 물론 생활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책 2권보다 3권이 많다는 것. 그냥 바로 알아차려진다.

하지만 3이 2보다 크다는 것은 실재로 그 사태가 벌어졌음과도 무관하고(책 2권, 책 3권이 있음의 여부) 시간과도 무관한 것이다(지금이든 어제든 내일이든.. 상관 없이 적용됨). 결국 이러한 논리 법칙은 실제 경험에서 심리학적으로 귀납적으로 발견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런 모호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설은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이토록 치열하게 하고 있다. 후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 분명하다.

후설. 논리연구. 3절. 심리학주의, 그 논증과 통상적 반증에 대한 견해

앞서 1절과 2절에서 논리학은 기술적이고, 규범적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규범적인 논리학은 이론적 기틀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설은 이에 이어 논리연구 3절에서 논리학의 이론적 기틀이 과연 심리학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17. 규범적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가 심리학에 있는지의 쟁점

그렇다면 어떤 이론적 학문이 학문이론의 본질적 기초를 제공하는가?

현재는 심리학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 논리적 기술학에 유일하고도 충분한 이론적 기초를 준다고 이야기 한다. 밀은 “논리학의 이론적 토대는 총체적으로 심리학에 의거하며, 기술의 규칙들을 정초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심리학에 포함한다”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18. 심리학주의자의 논증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어떤 소재를 기술적으로 처리하였는지가 그 소재의 성질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게 되는데, 인식을 처리하는 규칙을 다루는 논리학은 당연 심리학에 귀속되지 않겠나?”

19. 이에 대립된 측의 통상적 논증과 심리학 주의의 응답

반대 입장: “논리학은 사유작용의 규범 법칙을 다루고, 심리학은 사유작용의 자연법칙을 다룬다. 논리학의 원리를 심리학에서, 즉 우리의 오성을 관찰한 것에서 찾는다면 사유작용의 우연적 법칙에 대한 인식으로 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의 우연적 규칙이 아니라 필연적 규칙을 추구한다”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오성의 필연적 규칙도 사유 작용의 법칙의 특수한 한가지 경우에 불과하다.특수한 경우라고 하여 심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반대 입장: “근본적으로 심리학의 과제와 논리학의 과제가 다르다. 심리학의 법칙은 심리와 경과를 인과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하지만 논리학은 그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진리의 내용, 즉 참인 결과를 위해 필요한 성질과 필요한 경과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그런데 논리학도 인과적 연관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으며, 자연적 연관을 연구하지 않고 이념적 연관을 추구할 수는 없다.”

반대입장: “논리학은 심리학에 기초를 둘 수 없다. 모든 학문이 논리학과 규칙과 조화를 이룸으로써만 학문이기 때문이다. 심리학도 논리에 근거할 때 심리학일 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순환론이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이는 논리적 규칙에 따라 추론하는 것과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을 동일시한 관점이다. 심리학이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되는것인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 YJi: 즉, 후설은 심리학주의자들이 심리학이 논리학의 이론적 기반이라고 하는 것에 반박하고자 하지만, 당시까지 그러한 심리학주의자에 대한 반대입장의 논지가 튼튼하지 못했음 또한 지적하고 있다.

20. 심리학주의자들의 논증이 놓친 빈틈

후설의 입장: 심리학주의자의 논쟁을 통해 확인 된 것은, 단지 심리학이 논리학을 기초짓는데 함께 관여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어디에도 심리학이 논리학에 본질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심리학에 독립적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이끌어 갈 ‘순수논리학’이 자리 잡을 곳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모든 논리적 규제가 궁극적으로 관련되고 그래서 논리적 진리에 관해 논의하는 경우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만 할 질리가 곧바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진리 속에서 논리학 전체에 본질적인 것을 쉽게 보게되고 그 진리의 이론적 통일을 ‘순수논리학’이라는 명칭으로 쉽게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써 (순수논리학의) 참된 상태가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실제로 입증할 수 있기 바란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3절 감상평

요약해보자면,

논리학은 실천적 기술학이고, 규범학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 규범적 명제가 타당화될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이론이 심리학에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심리학주의자의 의견(즉, 모든 사유작용에 대한 법칙은 심리학에 귀속된다)에 대한 반대 입장은 논리학의 규범적 특성에 기반하여 있어왔으나 그 논리가 부실한 수준이었다. 한편 너무나도 자명해보였던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또한 허점이 있었으니, 심리학이 논리학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논리학의 본질적 기초가 된다고 증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순수논리학이 필요하다.

라는 뜻인 것 같다.

확실히, 인간의 논리적 사유작용을 생각해볼 때 이는 심리학과 무관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 규범적인(당위적인) 특성을 심리학에서의 우연적 인과법칙에서 찾는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도 맞고, 이런 심리학만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기초가 된다고 보긴 어렵긴 어렵겠다. 어쨌든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심리학은 그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심리학이 아니고서, 순수 논리학이라 할지라도, 과연 인간이 그 사유의, 논리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하는 순수 논리학을 전개해나갈 수 있을까?

내용은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고있다. 그리고 순수논리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과연 후설이 찾아갈 순수논리학이란 것이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제시하는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수 있을지는 궁금하다. 아니면 사유의 필연적 법칙 이야기를 하는 건 반심리주의학 입장이고, 후설은 이것까지 찾으려는 건 아닌건가..?

여전히 어렵다. 어려워.. 뭐.. 일단 후설 선생님의 글을 읽어가곤 있긴 하다.

후설. 논리연구. 2절. 규범적 분과의 기초로서 이론적 분과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2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13.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관한 논쟁

앞서 논의한 것과 같이 논리학은 실천적 성격을 띈 기술학이라고 정당화 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논리학의 기술적 성격에 대해 부인하는 입장이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칸트는 우리가 올바로 *오성을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 임무를 맡은 응용논리학에 대해 이야기 했다.

  • *(칸트의) 오성: 감성 및 이성 다른 두 능력에 대비하여 대상을 구성하는 개념 작용의 능력인 지력 –>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생긴다.’

여기서 응용논리학은 오성(개념 작용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응용논리학을 한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완전한 독립학문으로, 순수이론적 학문으로 현존시켰다.

결국 두 가지의 입장이 대치되게 된다.

  • 기술학으로 파악된 모든 논리학은 고유한 이론적 학문, 즉 ‘순수논리학’을 기초로 한다 (칸트, 헤르바르트, 베인, 드로비슈 등).
  • 논리적 기술학 속에서 확인되는 모든 이론적 학설은 타 학문에 포함된다. 즉 그 자체적으로 근거하는 고유의 이론은 없다 (베네케, 밀, 지그바르트 등)

이 두 가지의 입장은 모두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무엇이 맞는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앞서 논의하였듯이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학문 자체에 대한 논쟁이며, 그러한 논쟁이 있음은 그 학문이 아직 불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규범적 학문의 개념. 규범적 학문에 통일성을 주는 근본척도 또는 원리

잠시 규범적 학문이란 무엇인지 따져보자.

규범이란 실재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더라도,’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위해 우린 여러 종류의 규범적 명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너는 내 말에 따라야만 한다’, ‘군인은 용감해야만 한다’, ‘인간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등등). 이 규범적 명제에서는 어떤 부류의 대상에 대해 일정한 의미에서 ‘좋은'(가치 있는) 또는 ‘나쁜'(무가치한)의 개념이 생기는 가치 태도를 전제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태도에서 우리는 ‘더 좋은’과 ‘가장 좋은’, 그리고 ‘더 나쁜’과 ‘가장 나쁜’ 등을 구별하며 무엇이 그러한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에 대해 더 가까운 조건이고, 먼 조건인지, 혹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인지 등을 따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그 가치를 최대로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는 규범적 명제를 가질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근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들어 칸트 윤리학의 ‘정언명법’, 혹은 공리주의자의 윤리학에서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등이 이에 해당 된다. 이 때 이 근본 규범은 어떤 것이 규범화 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해줄 뿐, 어떤 규범적 명제도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때 이 근본 규범의 총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목표를 세운다면, 그것은 규범적 분과의 이념이 생긴다.

즉, 각각의 규범적 학문은 자신의 고유한 근본 규범을 갖고, 이 근본 규범은 그때그때 규범적 분과의 통일원리를 서술한다.

15. 규범적 분과와 기술학

특히 우리는 실재적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관심이 있으므로, 규범적 분과의 개념을 기술학의 개념과 동일하게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모든 기술학은 규범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술학은 근본 규범이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의 특수한 경우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학은 실천적이지 않은 분과 또한 포함한다. 왜냐하면 기술학의 과제는 실천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목적을 다룬다기보다, 우선 실현할 수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규범을 확립하는데 더 좁은 과제가 해결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적 가치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변하는 모든 규범적 분과는 기술학으로 확장된다.

16. 규범적 분과의 기초인 이론적 분과

근본규범(또는 근본가치, 궁극적 목적)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분과들의 통일을 규정한다. 또한 근본규범은 규범화하는 생각을 그 분과의 모든 규범적 명제로 갖고 들어온다. 그러나 근본규범에서 측정한다는 이러한 공통적 생각 이외에 이 규범적 명제는 다른 명제와 구별되는 고유한 이론적 내용을 갖는다. 각각의 규범적 명제는 규범(Norm)과 규범화된 것(Normiertes) 사이의 측정하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형식의 모든 규범적 명제는 오직 ‘B인 A만이 C의 성질을 갖는다’는 이론적 명제를 포함한다.

  • YJi: 예를 들어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전인적인 간호만이 진정한 간호이다’라는 간호학의 이론적 명제를 포함하며, 여기서 ‘진정한 간호’라는 새로운 명제는 순수 이론적 명제이고, 어떤 규범화하는 판단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C자체에 대한 가치 태도가 생기면, 그에 따라 ‘오직 B인 A만이 좋은 것이다’,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규범적 형식을 받아들일수 있다.

  • YJi: 즉, ‘진정한 간호’라는 명제에 대한 가치태도가 생길 때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규범적 형식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C의 존재는 규범적 학문의 명제 속에 끼워져 있는 이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일정한 이론적 학문 속에서 논리적 자리를 가져가야만 한다.

따라서 규범적 학문이 자신의 명칭에 걸맞아야하면, 규범화할 수 있는 사태와 근본규범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규명해야 하면, 규범적 학문은 이러한 관계의 이론적 핵심내용을 반드시 연구하고 그래서 관련된 이론적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모든 규범적 분과는 어떤 규범도 아닌 진리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규범적 학문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는 어떠해야 하는가?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2절 감상평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 우리는 1절에서 논리학이 기술학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기술학인 논리학은 그만의 독립적인 이론적 기틀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학문을 기틀로 하는가?
  • 앞서 논의하였듯이 논리학은 규범적이라 한 것을 짚어보면, 규범적인 학문은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 고유한 근본규범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체를 이룬다. 따라서 그 근본규범은 일정한 이론적 체계 내에 있어야 한다.

뭐 이런 뜻인 것 같다. 누가 동화책같이 써둔 것은 없을까? 독해가 너무 어렵다..

후설(Husserl) 공부하기 – 부제: 사태 그 자체로에서 후설 그 자체로의 환원.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후설에 대한 강의를 결재했다.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2차 문헌만 가지고 응용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뭐.. 꼭 현상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남편 하나 이해시키지 못하는 게 한심스러워서만은 아니지만, 내가 남편 하나 설득 못시키면 누굴 설득시키겠는가..?

그래서 결국, “사태 그 자체” 에서 “후설 그 자체로” 환원했다.

일단 후설의 “논리연구”와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이라는 비교적 후설 초기 연구에 대한 박승억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표현 자체에 익숙해지자 싶어 후루룩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문득 부상하는 정체성 혼란..

‘나는 어디에…? 나는 누구…?’

분명히 나의 시각과 청각은 강의를 지각하고 있을 터인데, 나의 의식만큼은 강의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수많은 순간들.. ‘나는 간호학자인가 철학자인가..?’, ‘순수 의식이 어떤 속성을 갖는지는 나와 무슨 상관인가??’, ‘다양체고 뭐시기고, 유클리드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어쩌고..이게 다 뭐인교..’, ‘차라리 메를로-퐁티 강의를 들어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신체적 현상학적 관점이나 더 학습할걸 그랬나..’, ‘현상학자는 어쩌다 현상학자가 되는걸까?’ …………..’어? 강의 들어야지..!!!!!!!!!!!!!!!!!!!!!’

그래도 어찌저찌됐든 속도감 있게 한번 쭉 들어보니, 나의 위치 파악정도는 어렴풋하게 되긴 한다.

  • 후설은 모든 경험과학이 정초하기에 마땅하고 타당하고 온전한 기반이 되는 지식(철학)을 추구하며 그것을 현상학이라 칭하였고, 현상학이 탐구 해야 할 수많은 과제들을 던졌다.
    • 그리고 그 이후에 수많은 현상학자들이 그 과제를 섬세하게 탐구해나가며 여전히 그 숙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즉, 경험과학이 정초하기에 마땅하고 타당하고 온전한 기반이 되는 지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경험과학을 탐구하는 나와 같은 학자들은 1) 현상학의 지식 찾기 방법론을 수용하여 각각의 경험과학을 더 엄밀하게 탐구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2) 현상학에 기반을 둔 경험과학을 세움으로써 더 엄밀한 지식체를 만들고자 하고 있다.

즉,

  • 나는 내가 간호학을 어디에 정초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 간호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 현상학의 방법론에도 익숙해야 한다.
  • 그러면서 그 현상학이라는 토대 위에 간호지식체를 세워가는 일을 해야 한다.

이건 그냥 어렴풋이만 그려봐도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다.

요즘 간호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경험과학들은 4차 산업혁명의 흐름 속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디지털 트렌스포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AI, 빅데이터 등을 적극 활용하며, 나름의 긴장감을 가지고 따라가고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나는 이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 때 따라가더라도, 그 학문과 전문직이 꼭 놓치지 않아야 할 본질을 잘 지킨 상태에서 그것을 수용할 때 더 의미 있는 사회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모종의 믿음 같은 게 있었다. 그러다 만난 현상학인지라.. 여기가 내가 누울데인가 싶었는데~

진짜 누울때가 되어서도 끝은 안날 수도 있겠다는 상황파악이 좀 되어가다보니, 약간은 주춤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일단 하는 만큼 해 봐야지. 어렵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6장.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서문)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 서문에서 현상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한편으로 현상학은 본질주의의 한 형태로 특징지어진다. 단지 상이한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 설명이나 사실적 설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은 의식의 흐름, 체화, 지각 등의 불변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계와 인간 실존을 탐구하기 위한 출발점은 현사실적 존재로 남아있다. 현상학은 단순히 본질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라 현사실성의 철학이기도 하다.
  2. 현상학은 초월철학의 한 형태다. 그것은 경험과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반성을 추구하며,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형이상학적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그 가정들(특히 마음-독립적 세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가정)을 유보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상학은 반성이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며, 철학의 핵심 임무는 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세계와의 접촉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3. 현상학은 엄밀하게 ‘학’으로서의 철학을 확립하고자 하지만, 또한 우리의 생활세계를 설명하고 공간과 시간, 세계에 대한 선과학적 경험을 정의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4. 현상학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분야로 자주 기술된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그 자체로 주어진 것으로 기술한다. 현상학은 경험의 신경생리학적 기원 또는 생물학적 기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인과적 설명을 제공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후설 자신도 발생적 현상학, 즉 지향적 구조의 기원과 발전, 역사성을 분석하는 현상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1. 본질과 경험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하지만 생활세계에 곤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다.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고, 그 방법을 맹신하는 경향이 있으나, 메를로-퐁티의 주장대로 우리는 우리의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 또한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주체성과 상호주관성

현상학에서의 “주체성”은 감추어진 내면성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여는 것으로, 나는 단순히 나에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에 대해서도 존재하며, 나에 대한 이해는 나만의 이해가 아니라 타자들의 이해를 포함함을 인정한다. 세계는 주체성과 상호주관성과 분리 불가능 하며, 현상학의 과제는 세계, 주체성, 상호주관성을 그 고유한 연결 가운데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3. 당연하지 않은 세계

우리와 세계와의 관계는 너무나 근본적이고 명백하기에 보통 그것에 대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상학은 이렇게 무시된 명백함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멋진 세계를 이해하고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을 중단할 필요가 있다.

4. 사실적 경험의 풍부함을 포착하는 것

현상학적 탐구는 사실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이행해나가지만 본질을 찾는 것이 분석의 목적이 아니다. 본질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사실적인 것의 풍부함을 포착하기 위함이지, 현사실성을 추상화하고 무시하려는 욕망 때문이 아니다.

5.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

메를로 퐁티는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세계 속의 유한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세계에 몰입된 삶을 단번에 단절할 수 있는 절대적 반성을 수행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환원을 실행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으며,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6. 현상학은 진행중

현상학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항상 진행중이라는 사실은 고쳐져야 할 결함이나 단점이 아니라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다. 현상학은 견고하고 융통성 없는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대한 경이이자 끊임없는 운동이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 (김동규 옮김)”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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