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4장. 과학과 생활세계)

1. 현상학에서 본질은 무엇인가?

철학자는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며, 본질은 불변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단 자하비도 “철학자로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연한 특징과 우연한 속성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설은 생활세계, 지향성, 체화, 시간성 등 근본적인 주제의 불변하는 보편적 구조를 찾고자 헌신하였다.

한편 본질을 찾는 능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에서 문제없이 채택하는 능력이다(우린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이 다 어떤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암묵적올 알고 있으며, 책장 사이에 노트북같이 우연하고 우발적인 것이 껴 들어가 있을 때 쉽게 구분해낼 수 있다). 어떤 대상의 본질적 구조를 찾기 위한 형상적 변경은 일종의 상상의 도움을 받는 개념적 분석이지 누구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이 아니다.

또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통찰은 변형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디지털 책이 책으로 간주되어 책의 개념이 달라졌듯이). 그리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연구되는 대부분의 대상들은 본질적인 모호함으로 특징지어지고,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분류와 기술은 본질상 근사치적이기도 하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대상에 정확성과 정밀성을 본질로 부과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적이다.

2. 본질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우리의 탐구는 실제로 주어진 것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우리의 탐구 방법은 특정한 과학적 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당면한 주제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후설이 “참된 방법은 탐구되어야 하는 사태들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지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 같이 말이다. 모든 것은 그 영역에 적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환원주의는 대상을 자연과학적 방법과 원리 중 가장 간단한 것으로 환원시키며, 제거주의 또한 자연과학의 방법과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제거해버린다(의식 또한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설명되지 않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또한 과학적 자연주의는 방법적으로도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도출된 것 만을 참으로 여긴다. 즉, 과학적 환원주의, 제거주의, 과학적 자연주의등 (낯설지 않은 이런 방식들은) 사회학과 인문학 등의 현상에 대한 설명은 과학적 가치가 없다고 간주해버린다.

정말 그러한가?

결코 그렇게 볼 순 없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생활 세계가 과학에 의해 망각되고 억압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 조차 생활 세계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메를로 퐁티의 주장대로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신체적으로 고정된 1인칭 관점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경험적 차원이 없다면 과학은 무의미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연과학만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편협한 생각이며, 우리의 경험세계는 그 나름의 타당성과 진리가 있으므로 과학의 승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자연과학적 방법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의 본성에 따라 탐구해나가야 한다.

3. 나의 성찰

내가 다루는 간호 현상은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모든 간호 현상을 숫자로만 측정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간호 현상이 가진 풍부한 색깔을 가리는 일이 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본질이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은 뭔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개념이다. 본질이라고 하면 일단 딱 떨어져야만 할 것 같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간호 현상의 그 모호한 본질을 찾기 위해 자연과학적 방법 뿐 아니라 현상학적 질적연구라는 도구 또한 장착하기로 마음 먹었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에포케?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3장. 방법론적 고찰)

현상학자 후설은 세계를 밝히기 위해 의식을 탐구하였고, 의식을 단지 세계 내의 일부로 존재하는 한 대상이라기보다 세계에 대한 주체로 간주하였다.

또한 후설은 세계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야만 하며, 이를 위해 우리 의식은 에포케라고 부르는 것을 수행하는 일, 곧 특수한 괄호치기나 판단중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때 무엇을 괄호치거나 판단 중지해야 하는가? 에포케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해석에는 많은 의견 불일치가 있어왔고, 단 자하비는 3가지 대표적인 오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에포케에 대한 일반적 해석

오해 1.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 사유의 습관, 편견, 이론적 가정이다. 현상학은 대상을 향한 전회이다!

이 관점에서 현상학은 열린 마음으로 대상들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이때 현상학은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descriptive) 과제이며, 현상의 특이성을 존중하기 위해 가능한 세세하게 기술해야 한다.

나도 이것이 에포케라고 배웠다. 대상에 대한 선입견, 편견, 이론적 가정 등을 내려놓는것. 그런데 아니라고?

단 자하비는 이것이 현상학의 일부 특성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나 현상학적 분석의 범위를 적절하게 포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단 자하비에 따르면 현상학은 대상을 향한 전회만을 포함하지 않는데, 오해1의 관점은 대상과 주체 혹은 세계와 마음의 상호 관계나 상관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체계적 야심을 결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상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되, 그것이 우리 의식에 어떻게 경험 되는지에 대한 관계 또한 놓치면 안될 것 같다 (내 생각).

오해 2.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세계의 대상들과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이고 자연적인 집착이다. 현상학은 주체로의 귀환이다!

이 관점에서 현상학은 우리 내면의 경험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양상을 주제화하고 기술하도록 우리의 관심 범위를 넓힌다.

단 자하비는 이 또한 현상학의 일부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나 현상학적 분석의 범위를 적절하게 포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현상학은 주체로의 귀환만을 포함하지 않으나, 이 관점도 대상과 주체 혹은 세계와 마음의 상호 관계나 상관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현상학의 체계적 야심을 결여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그동안 차마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경험을 포착하고 탐색하더라도 그 차원이 세계와의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가지고 있기에 그래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내 생각).

한편 이런 오해도 있다.

2. 의식과 실재

오해 3. 현상학은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며 존재에 대해서 물을 수 없다. 우리가 괄호쳐야 하는 것은 실제로 현존하는 세계다.

이 관점에서는 현상과 사태가 어떻게 나타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실재로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부적절하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단 자하비는 후설은 세계와 참된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몰두하였으므로 에포케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3.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에포케를 하라는 것인가?

단 자하비는 에포케를 “실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특정한 독단적 태도를 중단시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 때 말하는 실재에 대한 독단적 태도는 우리의 전이론적 삶에도 스며들어 있는 자연적 태도, 즉 우리가 경험에서 마주하는 세계가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를 중단하는 것도 포함한다.

실재가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현존한다는 자동적인 믿음을 유보함으로써 실재는 특정 관점에서 드러나고 주제화되며, 처음으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 접근 가능한 것이 된다.즉, 에포케와 환원은 실재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기보다는 바로 그 실재를 철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에포케를 통해 실재를 더 이상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대상들이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나타내는 대상과 관련된 지향적 작용과 경험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에포케는 초월적 환원을 위한 첫걸음이자, 적극적인 반성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성적 연관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4. 에포케는 후설만의 주장인가?

단 자하비는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가 에포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으나,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 또한 철학적 사유의 태도에 이르는데 필요한 반성적 운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후설의 에포케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5. 나의 성찰

나에게 에포케는 지향적 존재이자 세계-내-존재인 가 의식적으로 결코 분리하기 어려운 현상(대상)을 면밀하고 객관적으로 밝히 드러내기 위하여 나의 일상적인 의식적 습관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사태를 새롭게 바라보려고 하는 의지적 작업으로 해석된다. 맞을까..? 단 자하비는 분명히 최대한 쉽게 설명한 것 같긴 한데, 쉽지 않다.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지향성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2장)

1. 지향성 (Intentionality)이란?

현상학을 공부할 때 자주 등장하는 “지향성”.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어떤 의지나 목적이 있다는.. 그런 성질을 말하는 것일까?

네이버 사전에 “지향”을 검색해보니 다음의 3가지 정의가 나온다.

  1. 어떤 목표로 뜻이 쏠리어 향함. 또는 그 방향이나 그쪽으로 쏠리는 의지.
  2. 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 일
  3. 동기가 되는 목적의 관념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예상되는 결과의 관념을 이르는 말.

처음에 생각해봤듯이, 보통 지향이라고 하면 1번의 정의를 생각하기 쉬운 것 같다.

하지만 현상학에서의 “지향성”은 2번의 정의를 의미하며(의식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 일), 이는 의식의 속성을 말한다 (네이버 사전에 있어서 살짝 감동했다).

의식은 의식 자체와만 연관되거나 의식으로 점유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한 사실.

2. 현상학과 지향성

그렇다면 현상학에서는 왜 그토록 지향성을 중요하게 다루는가?

그 이유는 이 “지향성”에 대한 연구가 주체와 대상 간의 차이 뿐 아니라, 그 둘의 연결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지향적” 속성은 자기-초월적 성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향적 속성을 가진 마음은 평소 폐쇄된 곳에 갇혀 있다가 어떤 자극에 의해 세계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 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에 관여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세계 내 존재). 또한 우리가 의식하는 ‘대상(세계)‘들은 단순히 의식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게끔 단순히 의식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고, 현시하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대로 현전하도록 구성되어 우리의 의식과 연관된다.

우리는 평소 우리에게 나타내는 대상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기 쉬우나, “지향성”을 주요 관점으로 삼는 현상학은 이러한 사유 작용(cogito)사유 대상(cogitatum)의 상관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즉, 현상학은 주관적 경험 자체에 대한 좁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어떻게 있는 그대로 나타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지닌 의미와 더불어 나타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대상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검토는 대상들의 나타냄의 방식과 상관된 경험의 구조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나타내는 대상들을 탐구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나타나는 대상들에게 있는 자로서 드러낸다.

결국 지향성의 교훈은 마음은 본질상 열려있고, 세계는 본질상 현시 가능하므로 마음과 세계는 동시에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나의 성찰

나는 현상학자가 아니니 의식의 지향성 그 자체에 대해 연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간호 대상자들과 그들의 세계를 다루는 간호 현상을 연구할 때, 이 의식의 지향성은 놓치지 않고 가져가야 할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호 대상자들은 그들의 세계(혹은 질병)를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가, 그리고 그 세계(질병)는 간호대상자에게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현상. (단 자하비 “현상학 입문” 중 제 1부, 제 1장.)

본 글은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글임을 밝힌다.

1.현상학 입문

현상학은 현상에 대한 학문 또는 현상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 이 때 “현상”은 어떤 대상의 내용적 특성이라기보다는 대상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각기 자기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내고 우리에게 달리 주어진다. 즉, 현상학은 다양한 대상이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어(appears) 우리에게 주어지는가(givenness)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2. 자명종 시계에 대한 현상학적 관점

단 자하비는 자명종 시계를 현상학적으로 고찰하여 설명하였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자명종 시계의 특정 면 만을 볼 수 있지만, 그 면 말고도 많은 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있다(그렇지, 지금 나는 노트북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지만, 이 모니터 뒤의 판은 흰색이고, 13인치고, c타입으로 충전하고…).

우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면 외에도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명종 시계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배경 안에 존재한다(그렇지, 지금 나는 노트북 모니터와 책을 돌아가며 보고 있지만, 노트북과 책이 놓여져 있던 책상은 검정색이고, 외발이고, 옆에 마우스가 놓여져 있고, 오랜만에 온 카페 도노즈 안에 있고..)

“지각 경험은 결과적으로 현전과 부재의 상호작용을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결코 고립된 상태로 주어지지 않고, 보는 것의 의미를 촉발하는 지평(horizon)에 에워싸인 채로 주어진다.”

자명종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자명종에 집중하고 있지만, 실은 그 앞에는 다른 컵, 펜, 책 등이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관심은 아니고 배경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원래는 배경이었던 자명종 앞의 책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내가 지금 타이핑을 하면서 난 모니터에 쓰여지는 글씨에 집중하고 있고, 열심히 움직이는 내 손가락은 전혀 신경도 안쓰다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내 손가락이 얼마나 열일을 하고 있는지 바라보게 되는 것같이..)

“실제로 이러한 주제의 변화 가능성은 정확히 나의 주제가 그 변화와 함께 주어지는 장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장 안에서 내가 정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한편 그 자명종은 지각하는 자의 신체를 통해 지각된다. 신체적으로 보고, 만지는 등 상호작용을 하며 자명종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즉, 지각을 한다는 것은 “부동의 정보 습득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체적 활동”이다. (모니터, 책, 컵, 마우스 등등은 눈으로 인식하고, 손가락으로 타이핑하고 만지는 등을 통해 알게 되는 것 같이..)

그리고 그 자명종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은 순간적이고 단절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적 구조와 배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처음 그 조명종을 마주했을 때보다 2분 지난 후, 그리고 10분 지난 후, 그리고 지금.. 그 자명종은 나에게 점차 다르게 자신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르게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바탕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기대를 가지고 현재를 접한다.” ‘저 자명종을 우리 사무실에 가져다 두기에도 적절하겠다’라는 판단은 그냥 자명종을 보자마자 생기는 판단이 아니다. (지금 내 노트북은 내게 너무 소중하고, 너무 소중하고, 너무 소중하다. 대학원 박사과정 공부를 하면서 샀고, 지금 공부하느라 매일같이 쓰고 있고, 내일도, 모래도, 글피도,, 계속 계속 내 도구가 되어줘야하니까..)

한편, 그 자명종은 누군가에게는 절대 집에 둘 수 없는 자명종일 수 있다. 즉, 그 자명종은 나에게 나타났지만,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단 자하비의 “현상학 입문”은 내게는 너무 두근거리고 행복한 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책일 수도 있겠지.)

3. 나타냄과 실재

무엇인가가 내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인가, 그것의 배후에 있는 우리가 밝혀내야 할 어떤 진짜가 있는 것인가?

고전적으로 과학과 철학은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찾고자 하였으나, 현상학은 그 현상이 주는 것이 바로 그 자체로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 배후에 있는 것은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현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재를 감추고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다만 현상학자에게는 “그 자체로 현전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이해될 수 있는 세계(현상학적 관심)”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과학적 관심)”는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두가지 현시(manifestation) 방식의 구분일 뿐이다.

현상학자들은 접근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저편으로 말미암아 객관적 실재성을 정의하기보다 객관성을 지정할 올바른 장소가 저편이 아닌 나타내는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4. 나의 성찰

나는 결과가 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래서 뭘 해야 하는건데?”

어쩌면 ‘나보다도 성격이 급하고 정확하고 의미있는 결론을 최대한 빨리 듣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교수님’의 ‘가뜩이나 바쁜 회진 시간’에 ‘회진을 가이딩’하며 환자를 ‘daily로 브리핑’하면서 얻은 습관일 수도 있고, 고민을 하는건 너무 소진 되는 일이니 빨리 결론을 내는 게 속 편한 아빠의 유전적 소인 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난 결론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여전히 좀 그렇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내가 아는 결론은 그래봐야 특정한 경계 안 에서의 진실일 뿐이고, 그 경계 밖 세상까지 고려한다면 그 진실에는 의문을 약간 남겨놓아야만 했다. 이것이 모든 의학 및 간호학 논문의 마지막에 나오는 Limitation. 모든 결론은 그 Limitation안에서 해석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이런 인식을 하던 차에 만난 것이 바로 현상학이었다. 모든 객관성을 지정할 장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현상학. 현상학은 나에게 내가 평소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어야 할 철학이라고 자신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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