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띄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전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약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눈에 띄더라도 좀 나중에 눈에 띄고 싶습니다.
인정 받더라도 좀 나중에 인정 받고 싶습니다.

교회를 다닌지.. 이제 10년이 좀 넘었군요. 오홋!! 강산이 한번 바뀌었겠습니닷!! ^^

음.. 교회를 다닌지 10년..
놀랍게도 이 10년 가운데, 나서서 얼굴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은 것은..딱 2년입니다. 그것도 가장 처음 1년과 가장 최근 1년. 그리고 중간기간 8년은 항상 뭔가 나서서 했습니다. 나서서 뭘 하는 걸 정말 좋아했습니다.

ㅋㅋ어렸을 때부터 제 얼굴에는 뭔가 두꺼운 철판이 하나 깔려 있었던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반장선거할 때 하고싶다고 손드는 애가 저였으니까요..

ㅋㅋ 이런걸 똥베짱이라고 하나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임원선거 때면 손들어서 임원되고..ㅋㅋ 찬양단, 성가대, 교사 등등, 눈에 드러나는 건 왠만큼 다 해본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칭찬과 인정도 받았었죠..생각해보면 열심히 교회활동했던 8년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먹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1여년 전부터 어떤 것도 하지 않게 하시더라구요. 가만히 잠잠히 회중으로서의 자리를 지키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음.. 솔직히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좀 쉬고싶기도 했었기에, 하나님의 이러한 환경으로의 인도하심은 아주 Welcome이었습니닷!!

음.. 눈에 드러나는 것, 임원이나 찬양단, 교사는 현재 하고있지 않지만, 그대신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의 마음을 주시더라구요. 그래서 현재는 중보기도의 자리만 조용히 지키고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이 자리라도 지키지 않았더라면, 저..성격상 정말 피폐해졌을 것 같습니다..ㅋㅋ

어쨌든, 그럼 저의 10년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정리가 될까요??

처음 1년은 적응기, 그리고 8년간의 눈에 띄는 신앙생활, 그 뒤의 1년간의 조용한 신앙생활..
그런데 말이죠. 제게 있어서는 이 1년간의 조용한 신앙생활이 결코 수줍은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강력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가 눈에 드러났을 때를 회상하며 말이죠.

음.. 예를 들어..찬양단!!
전 제 신앙생활 10년 가운데 8년동안 찬양단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때로는 피아노로, 때로는 singer로서.
그러나 지금은 잠잠히 회중의 자리에서 찬양합니다.

그런데!!
전 지금이 하나님께 찬양드리기에 훨~~~~~~~~~~씬 더 자유롭답니다!!
지금 찬양할 때 하나님을 훨씬 더 깊게 경험합니다.
훨씬 더 자유롭게 춤을 춥니다.
훨씬 더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히려 지금은, 제 주변에서 다른 지체가 찬양을 하고 있으면, 그 지체의 귀에 제 찬양의 소리가 들어가게 하고싶지 않아 자리를 옮깁니다. 누군가가 제 찬양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제가 제 목소리자체에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찬양할 때 만큼은 다른 사람들과는 떨어진 곳에서 찬양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찬양단도 웬만하면 쳐다보지 않고 눈을 감고 찬양합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은혜가 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 더 집중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 지난 8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죠.

예전엔 늘 앞에 서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늘 항상 나를 지켜볼 누군가를 의식하며 찬양을 했었으니까요.
오히려 쳐다봐주길 원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누구의 시선과 관심도 의식하지 않은 채 찬양을 할 수 있을 때 정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찬양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정말 대단해져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앞에 서서, 회중들을 신경쓰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을까?? 그건, 정말 보통 수준 이상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게 만약 다시 찬양단을 하라고 한다면, 전 그저 제 목소리로만 찬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보통 찬양단처럼 회중을 바라보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찬양하고 싶습니다. 절 쳐다볼 회중들을 의식하며 진심으로 찬양할 자신이 아직 없습니다.

이런거 보면, 전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해야할 시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시선에 대한 의식을 완전히 떼어버리지 못했습니다.

비단 찬양단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다른 사람 시선에 대한 관심이란 것이 끼어든 순간부터 많은 것이 희미해집니다.

이건 정말 너무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에만도 시간이 너무너무 아까운데..

이렇게 블로깅을 할 때도 마찬가지랍니다.
전 그저 하나님께 고백하듯 제 생각을 기록하기로 하고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많은 분들께 읽히는 걸 보며, 제 하나님만을 향했던 그 태도와 마음이 희미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읽힐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 글을 읽으시고 저란 애를 오해하지 말아주세요ㅠㅠ

음.. “얘는 아직 멀었구나.. 아직 어리구나..”라고 생각하신다는 건, 정말 맞는말이니 괜찮습니다. 그저 격려해주세요.

그런데..혹시라도 “얘는 좀 괜찮은 애 같구나. 굉장히 신앙이 깊고 성숙한 것 같아..”라고 생각이 드신다면 그냥 잡생각이었다 하고 던져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절대적으로 환상입니다.

제 블로그는.. 고백의 공간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을 기록하는..굉장히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공간입니다. 전 저보다 하나님이 더 드러나길 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혹시라도 저라는 애가 더 드러나게 될까 겁이 납니다.

눈에 띄더라도 좀 나중에 눈에 띄고 싶습니다.
인정 받더라도 좀 나중에 인정 받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격려를 감사함으로 받되, 그것으로 저의 교만함을 쌓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 더욱더 친밀해진 후에, 그 때 세상속에 우뚝 서고 싶습니다.
아직 저는 잠잠히 시간을 기다리며 움틀 준비를 하고 있는 씨앗이고 싶습니다.

하나님.
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쾌한 향기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직 전 세상에 드러나기엔 너무 연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좀 나중에.. 하나님께서 저를 충분히 연단시키신 후에, 제가 다른 사람의 관심에도 초연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 후에, 그 때 저를 세상가운데 드러내주세요. 그 때 눈에 띄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선한 영향력을 충분히 세상에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서있게 되었으면 좋습니다.
아직 저는 너무 연약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어린 시선으로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저로 하여금 당신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제가 절대절대절대로 드러나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그저 하나님 당신만 드러나기 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절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시고 낮추셔요. 전 당신것입니다. 전 당신의 소유입니다. 당신만 바라보기 원하는 당신의 소유물입니다. 아시죠??

나의 사랑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하나님은 고무튜브, 나는 해변의 여인.

혹시, 파도 타보신적 있으세요?? 이 겨울에 춥게시리 무슨 파도냐 싶지마는..;;

음.. 저도 솔직히 서핑 보드로 파도를 타본적은 없지만, 검정색 고무 튜브로 바다에 몸을 맡겨본 경험은 좀 있습니다!!ㅋㅋ

이 파도타기는..!!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정말.. 스릴 만점입니다!!!

동해바다 깊은 물, 파도도 높고, 그 가운데 의지할 것은 고무튜브밖에 없습니다.
그 고무튜브를 몸에 두르고 바다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갑니다.
어느정도 깊어졌다 싶으면, 애써 그 고무튜브 위로 올라가 엉덩이를 걸치고 앉죠.
그리고 그때부터 고무튜브에 온전히 몸을 맡기며 파도를 즐기기 시작합니다.
찰싹 찰싹~

이제 믿을 것은 튜브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다가는 파도를 잘못 타서 해변으로 향하지 않고 더 멀리 밖으로 향하게 될 위험성이 있지만,
그래도 그 해변 근방에서 파도를 즐기는 건 정말 스릴 만점입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튜브와 내가 하나가 된 느낌이랄까요?? 😀
그런데 요즘들어 이런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은 검정색 고무튜브같고, 나는 해변의 여인같다..

헤헷^^

하나님과 파도를 같이 타는 것..
역시나 스릴 만점입니다. 오히려 그 이상이죠!!

그분께 온전히 내 몸을 맡긴 채, 나는 편안히 누워 여유나 부리고 있을지라도, 고무튜브같은 하나님은 파도를 즐겁게 타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스릴을 절로 누리게 됩니다. 때로는 신나게, 때로는 두렵게, 때로는 무료하게..

그런데 진짜 고무튜브와 이 하나님 고무튜브가 다른 점은, 위에서 말한 것같이 진짜 고무튜브는 자칫하다가는 더 멀리 바닷가로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바다 미아가 되게 만들 위험성을 소지하고 있지만, 하나님 고무튜브는 위험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멀리 멀리 나아가게 되어 바다에 표류하게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솔직히 걱정할 게 없지요.

어쨌든 왜 이런 쌩뚱맞은 비유를 떠올리게 되었냐 하면..

요즘들어 뭔가 제 삶에 은근히 파도가 많았거든요. 이 블로그에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음..표면적으로는 솔직히 별로 다를 게 없었는데, 저의 신체적, 사회적, 심리적, 영적 상태가(ㅋㅋ) 정말 파도를 타는 것만 같았습니다. 슉 올라갔다가도 츅 떨어지고, 츅 떨어졌다가도 슉 올라가고, 슉 올라갔다가도 잠잠해지고.. 잠잠했다가도 금새 또 슉 올라가고.. 솔직히 잠잠한 기간 별로 없이, 슉, 츅, 슉, 츅.. 정말 파도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전 이런 파도들을 타며, 내가 왜 이런 파도를 타야하나 불평해하고 힘들어 했었습니다. 정말 땀나도록 지치더군요. 더이상 파도 탈 기력도 남아있지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았더니, 실제로는 제가 직접 이런 파도들을 탄 게 아니라, 전 그저 고무튜브에 몸을 맡긴 상태였더라구요..

이걸 어떻게 알게 됐냐구요??
이 파도타는 기간동안 제가 매주 삶 속에서 치열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 청년부 목사님의 매주 금요예배 말씀 선포를 통해 매번 위로되고, 해결되고, 분명해지는 것을 계속 경험해 왔던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알게되었습니다!! ^^

너무 너무 놀랍게도, 비전에 대해 붙들고 있었을 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비전에 대해 가장 꼭 필요한 말씀을 받았고, 풍요로움에 대해 붙들고 있었을 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부와 빈에 대해 가장 꼭 필요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저 우울해하고 있었을 때는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너무 너무 놀랍게도 제 상태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퍼즐 맞추기처럼 꼭꼭 들어맞아 왔었습니다. 마치..

“윤혜야. 우리 이번에는 이 파도를 탔어. 어땠어?? 좀 과격했지?? 그래도 그거 잘 타고 지금은 여기에 도착했단다.”

라고 말씀해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과 같이 파도를 타고 있던거구나.”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뭔가 갑자기 스릴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죠??

이걸 그냥 쉽게 말하면.. 음..일반적으로 하는 말로 바꿔 말하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로 간단히 표현이 될것인데..
그리고 이건 언제나 늘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던 것인데도..
고무튜브에 몸을 맡긴 해수욕장 처녀처럼, 하나님 튜브에 몸을 맡겨 하나님과 함께 파도를 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나서야, 뭔가 이 파도들도 타볼만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 낯설고 피하고 싶었던 파도들도 새로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스릴 있습니다.

다음엔 어떤 파도가 올지.
그리고 이 고무튜브는 이 파도를 어떻게 즐길지.
그리고 날 어디로 데려갈지.
하나님과 함께 흐름을 탄다는 것이 이렇게 좋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파도를 탄다는 것은.. 하나님이 고무튜브가 되어주신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너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 고무튜브는 네비게이션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정말 걱정할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무튜브, 나는 해변의 여인.
이 해수욕장 처녀는 이제 어떤 파도도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헤헷

하나님!! 가요가요!! 전 그저 하나님께 몸을 완전히 맡겨 버리렵니다!!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못난 나를 사랑하기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기대감은 누구든지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상대평가하든 절대평가하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가평가하게 됩니다.

전 이 자가 평가때문에 때로는 우쭐해지고 자신감 충천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울해지고 자존감이 완전상실된 상태에 이르게 되기도 한답니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음..좀 더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상대평가 하는 사람들은 아마 주변의 자신보다 잘나가는 분 덕분에 자극도 받고 충격도 받을테고, 주변의 좀 못나가는 분 덕분에 위로도 받고 느슨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절대평가는 축에 꼈던 것 같습니다.
수험생 생활 시절만 돌아봐도 알수 있는데..
가끔 애들이 친구들이 이런 얘기 하던거 기억하세요?

“OO는 진짜 공부 열심히 하는 거 같아. 쟤 하는거 보면 내가 정말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맞어, 맞어. 난 맨날 졸고 있는데..ㅠㅠ”

그런데 결정적으로 저는 이런 이야기들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없었으니..왜냐!!!???

누가 얼만큼 하는지엔 도통 관심도 없었고 눈도 가지 않았거든요. 그냥 저만 잘 하면 되는거였죠. 만약 지난번에 10등했으면 이번에 8등하면 기분 좋은거고, 지난번엔 80점 맞았으면 이번에 85점 맞으면 기분 좋은거고^^

스스로 절대평가 하는 것의 행복이란~ 캬앗~

주변 사람들이 얼만큼 하는지에 별로 관심이 갖지 않았던 만큼, 이 때까지 살면서 그다지 경쟁의식을 크게 느껴오지 않아 마음의 여유를 잘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나도 쟤만큼 잘하고 싶다.”
“나도 쟤만큼 예쁘고 싶다.”
“나도 쟤만큼 잘나가고 싶다.”

만약 이런 생각을 하며 늘 항상 경쟁하며 살아야 했다면.. 으윽.. 가뜩이나 이상한 제 성격.. 더 베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타고난 절대평가 기준은 제게 있어 축복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좋은 것 만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은!!
늘 항상 제 스스로에게 굉장히 높고 형이상학적 수준을 기대해왔었기 때문입니다.

“난 지난번엔 이정도였으니 이번에도 최소한 이정도는 기대해야지!!”
“난 뭘 하든 최소한 이정도는 해야돼!!”
“난 이 정도는 지킬 줄 아는 얘가 되야해!!”

공부든, 인간관계든, 도덕성이든, 신앙이든, 뭐든지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만약 제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감이나 죄책감을 갖기도 했죠.

견디기 쉽지 않은 좌절감..ㅜㅜ

그런데!!!
[향기로운 인격만들기]를 읽다가 이런 저의 모습을 분명하게 표현해주는 것을 읽게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저만 이런게 아니더군요!!! 헤헷..안도감..

이상적인 자아
우리는 모두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희미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완전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상상해 볼 수 있다. 잠시 동안 완전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보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라. 이렇게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당신이 상상해보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적 모습과의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리 모두는 상상 속에 있는 완전한 모습의 이상적인 자아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자아와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 만일 이 두개의 자아가 싸우면, 우리는 계속적인 갈등을 경험한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도 사실이고 또한 실제 존재하는 자아도 사실인데, 이 둘은 서로 싸움을 할 것이다.

진정한 자아
진정한 자아는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을 말한다. 진정한 자아는, 아무리 이상적인 모습이 되려고 노력했었다 할지라도 이상적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실제는, 우리의 자아가 타락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잃어버렸다. 우리는 연약하고 타락한 상태에 높여졌다.
이상적 자아와 실재와의 관계
이상적인 자아와 진정한 자아와의 사이에 현존하는 문제는, 이상적인 자아가 진정한 자아를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단정지으면서 진정한 자아를 정죄하고 화를 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둘 사이에 원수관계가 성립되며, 모든 적수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점점 더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헨리 클라우드,[향기로운 인격 만들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교회를 다니며 어렸을 때부터 높은 도덕적 기준을 들어왔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등..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형제를 욕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죄를 지은 것이고, 음란한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헐..

말씀대로 살고 싶었던 만큼 이런 말씀을 내면화 시키려고 해왔었고, 그랬던 만큼 제 안의 많은 것들을 못난이 취급 해왔었습니다.

제 이상적 자아는 제가 생각만으로도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천사같은 아이, 생각으로도 음란한 생각 하나 안하는 정결한 아이이고 싶어하지만, 현실적 자아는 절대 그렇지 못했거든요. 화도 내고, 야한생각도 하고.. 그러다 만약..

막 욕하는 마음이 생기면 금새 깜짝 놀라서 ‘아니!! 니가 이런 마음을 품어?? 당장 사라져!!!!!’

막 야한 생각이 들면 무슨 더러운 똥을 밟은 양, ‘아니!! 니가 이런 생각을 해?? 구역질나!! 당장 꺼져!!!’

라고 제 스스로에게 소리를 질러왔습니다. 누구에게도 잘 소리지르지 않는 제가..ㅠㅠ 제 스스로에겐 아주 가혹하게..ㅠㅠ

문제는..!!
어쨌든 막 욕하는 마음을 품었던 것도, 막 야한 생각을 했던 것도 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성적이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 것도, 인간관계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던 것도, 모두 제 자신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제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고 밟아왔으니.. 진짜 제 모습이 건강하게 살아있겠습니까?? ㅠㅠ

더군다나 제가 저의 이런 못난 부분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완벽한 천사같은 애가 되려고 하는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와 은혜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았습니다. 힝.. 그런걸 보면.. 전 그동안 예수님의 진짜 은혜의 크기를 완전 축소해서 생각해왔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But..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아니 그럼 어떻게 하라굿??

이런 개인의 이상적인 기준을 버리고 그냥 생긴대로 살라는 거야?? 마음 편하게 살라는거야??

Oh, No~No~

헨리클라우드 박사는 우리의 이상적인 자아를 삶의 목표로 삶고 우리의 현실적인 자아를 수용하고 사랑해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적인 자아를 삶을 필요, 요구 조건으로 삶는 것과 삶의 목표를 삶는 건 천지차이겠지요!!?? ^^)

어쨌든 이 이상적인 자아도, 현실적인 자아도 모두 나 자신의 일부니까요.. 이 둘을 화해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론이 너무 심플한가요? 그런데 제 생각에도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용서하신 제 자신을 만약 제가 정죄하고 있다면, 그건 예수님이 기꺼이 흘리신 그 보혈을 무시하는 꼴이 되잖아요.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제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는 건,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욕망과 다를 바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되고싶어 하는 가장 무서운 인간의 욕망..

정말..하나님께서 이미 제게 허락하신 많은 좋은 것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제게 있는 악한 것들로부터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무시해왔었던 제 완전하지 못했던 제 모습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그동안 무시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ㅋㅋ)

앞으로는 인정하고 사랑해주겠다고 사랑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내 안의 좋은 것도 나, 나쁜 것도 나!!

이제껏 무시당해온 윤혜안에 있는 윤혜야. 내가 앞으로는 널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께.
그동안 더러운 냄새난다고, 구역질난다고 냅다 버리려고 했던거 미안해..그래도 넌 내 자신인데 말이야..

예수님이 널 사랑하신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내 마음으로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못했던 거 정말 미안해.

앞으로는 꼭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께. 꼭 그럴께.

또 실수한다고 해도 상처주지 않고 너그럽게 이해해줄께. 사랑해줄께.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화나면 화난다고 자신있게 얘기해. 알겠지??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바른생활 컴플렉스 탈출하기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별명 아닌 별명이 있는데..

바른생활 어린이, 바른생활 소녀, 바른생활 청년..이게 그것들입니다ㅋㅋ

아!! 바른생활 어린이일 때는 애늙은이라는 별명도 있었던 것 같네요.

음.. 첫째 컴플렉스인걸까요??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척”하기 시작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선생님의 기대, 친구들의 기대, 이웃들의 기대, 목사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어린나이부터 나름대로 바락바락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바른생활 Something”의 별명을 갖긴 했지만..어렸을 때부터 별로 듣기 좋은 별명은 아니었고,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내가 정말 이런 별명을 갖기 합당한 녀석인지, 진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물음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때 저는 지극히도 모범생이었고, 엄청 도덕적일 것 같은 애었습니다.음..어쩌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눈치가 좀 없어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아니면 착하게 생긴건가요??

ㅋㅋㅋ
그런데 아직도 좀 그렇게 보이나봐요. 얼마전에 진실게임같은 것을 했는데 제 차례때 친구가 조심스럽게 물어보더라구요.

“아! 윤혜야! 너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물어봐도 될까..?? 다른게 아니고.. 너도 야한거 본적 있어?? “

헐.. ㅋㅋ

음.. 솔직히 지금은 저의 이 모습이 저의 가면인지 제 진짜 모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세상사람들이 바른생활처럼 판단하는 제 이 모습을 좀 벗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제게 너무 벅찬 일이란 것입니다. 어쨌든 전 제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한 모습만 보입니다. 보이는 것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 가면이 제 얼굴에 탁 달라붙어서 이제는 완전히제 자신이 되어버린걸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전 제 자신을 꾸며서 표현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제가 “남의 기대”, “남의 시선”을 너무나도 의식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동시에 두렵게 여기는 것.. 어제도 잠깐 글에 적었듯이 “관계”입 니다.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합니다.

누가 절 싫어하는 것을 못견딜만큼 두려워합니다. 누가 제게 실망하는 것 또한 못견딜만큼 두려워합니다. 살다보면 절 싫어하고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데,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든 좋아하게, 최소한 싫어하지는 않게 만드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요..결국 상처만 더 깊어졌지만요..

한번 한 친구가 제게 그러더라구요. 그 친구와 심하게 틀어진 후 제가 막 그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애 쓸때였는데..

“너는 니 생각밖에 못하는것 같아. 니가 지금 이렇게 화해하려고 하는게 날 위한거니 널 위한거니..?”

두둥!!!!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절 위한거였거든요. 이 뒤틀린 감정을 스스로 감당해낼 방법이 없어서 어떻게든 빨리해결하고 더 이상 생각하거나 아파하고 싶지 않았거든요..그 친구가 더 이상 절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든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버리고 싶었거든요. 어쨌든 전 누가 절 싫어한다는 사실에 생활에 지장이 될 정도로 질색을 하는 애입니다.

그런데 오늘 뭔가 분명히 정리가 되었습니다. 얼마전부터 읽기 시작한 [향기나는 인격 만들기]를 읽으면서요.

이 책에 따르면 저는 제 경계선과 남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했더군요.
음.. 엄밀히 말하면 오늘 제가 이야기 하고 있는것들은 남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한데서 오는 문제였습니다. 제 경계선 분명하지 않았던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결론 먼저 말하면, 다른 사람의 감정과 느낌은 다른 사람의 소유인 것인데 제가 그것까지 소유하려고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행동과 제 감정 등 제 경계선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책임만 있을 뿐인데, 제 행동과 제 감정에는 전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은채, 아니,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채 남의 감정에만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제 생각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변해주지 않으면 그 상처의 책임을 완전히 그 상대방에게 지워버렸지요.

나는 착하다. 그리고 그는 나쁘다.
왜냐..
난 나름대로 할만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속이라도 편해졌으면 모르겠는데.. 여전히 “누구누구는 나를 싫어해.”라는 감정은 저의 행동과 저의 감정을 제약했고, 저를 구덩이로 몰고 갔습니다.

허참..생각해보면, 만약 제가 이런 상처조차 받지 않은 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면 그건 완전 천사였습니다.

싫은 감정 하나 내지 않고..
웬만하면 따뜻한 표정으로..

“음..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하여 당신 기분을 나쁘게 해드린 것 같은데..그런가요..? 제 어떤 것이 당신 기분을 나쁘게 해드렸죠?? 말씀해주시면 고치도록 할께요. 기분 나쁘게 해드린것 죄송해요..”

속은 부글부글 끓으면서..

그런데 저라도 막 화가 났는데 누가 이렇게 다가오면 완전 질려버릴 것 같습니다..ㅠㅠ 이런 접근은 언제나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더라구요.

그래도 전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할 말이 있었죠.

나는 착하다. 그리고 그는 나쁘다.
왜냐..
난 나름대로 할만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때까지 이런 바른생활 컴플렉스에 싸여 가능한 착하게 보이게 하면서, 남의 감정까지 소유하려고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남의 감정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작 제 스스로는 솔직하지도 못하고 썩어가면서..다른 사람들 눈치 보느라 덫 속에 갇혀 있으면서..

그런거 보면..전 절대로 솔직한 애가 아니었습니다. 착한 가면을 쓰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며,속이고 있는 애였던 거죠..ㅠㅠ 죄송합니다

감정을 부인하거나, 감정에 대한 우리의 책임(우리 자신의 감정에 대한)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것이다. 헨리 클라우드.

그래서 오늘 제 스스로 한가지 확실히 해두렵니다!!

윤혜야!!
넌 다른 사람의 감정은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애야.
그것까지 니가 조종하려고 하면 그건 주제 넘는거야.
넌 니 감정이나 잘 책임져.
이때까지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 기대 때문에 너 자신을 억눌러 왔니??
네 감정을 부인해온 횟수를 한번 세봐. 착한척 하느라..셀수 있어??
네 감정에 대한 책임을 부인해온 횟수를 한번 세봐. 다른 사람 감정 책임지면서..셀수 있어??
일단 너나 잘해 임마!!

하나님.
더이상 착하고 밍숭밍숭한..바른생활 컴플렉스에 싸여 식은 맨밥처럼 맛없는 그런 윤혜이고 싶지 않아요.

음..착한 건 좋은거 같긴 한데 제 스스로를 속이며 겉으로만 착해보이는 그런 건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제 스스로의 감정에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세요.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확실하게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음..맞아요 하나님. 저 원래 좋고 싫고 분명해요. 그런데 심각한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영역에서만.. 제가 정작 민감하게 여기는 감정의 영역에서만큼은 좋다 싫다 분명히 하지 못했던거 아시잖아요.

상처 주기 싫어서, 상처 받기 싫어서.. 그런데 이런 솔직하지 못함이 더 상처를 줬고 더 상처를 받게 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하나님..당신이 허락하신 제 마음의 공간을 싱싱하게 잘 지킬수 있게 도와주세요.제 마음의 공간이 잘 환기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다른 사람의 기대와 칭찬 때문에 제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그런 바른생활 컴플렉스는 이제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이 모습이 가면인지 진짜 저인지도 헷갈리지만..일단 제 감정에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어요. 그리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싶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하나님!!

세상에서 제일 자기 자신을 그대로 솔직히 나타내실 수 있었던 그 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떨어진 꽃잎 같으니 (자작시)

하나님이시여.
나의 생명과 나의 호흡되시는 주여.
당신 앞에 다시 무릎으로 나아가오니
새 생명과 새 호흡을 허락하소서.
당신을 느낄 수 없는 나의 영혼은
가시덤불 깊은 속의 떨어진 꽃잎 같으니
고통속에 신음하며 매초마다 시들어갑니다.
내 영혼아 깨어라.
신선한 새벽의 새로움을 마시며
하나님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을 볼지어다.
내 영혼아 일어나라.
떠오르는 해의 경의로움을 맞으며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을 송축할지어다.
하나님이시여.
나의 생명과 나의 호흡되시는 주여.
신음속에 시들어가며 당신의 손길만을 기다리오니
나를 만져 주옵소서. 나를 들어 주옵소서.
당신을 느낄 수 없는 나의 영혼은
가시덤불 깊은 속의 떨어진 꽃잎 같으니
고통속에 신음하며 매초마다 시들어갑니다.

지윤혜

(2008년. 싸이월드 블로그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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