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논리연구. 6절. 심리학주의의 조명에서 삼단논법 추론. 추론공식과 화학공식.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6절을 공부하며 정리하였다.

30. 삼단논법의 명제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도

삼단논법도 심리학적 법칙이라고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한번 “모순적 명제는 함께 참일 수 없다.”는 논리법칙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을 한번 따져보자.

정말 그런가? 라고 따져가는 가운데 만약 눈에 띄지 않았던 모순이 그 추리 과정 과정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면, 기존의 추리 방식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언제나 심리학적으로 이해되는 것이고, 사유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

31. 추리공식과 화학공식

심지어 헤이만스는 ‘사유의 경험법칙’을 화학 공식과 같이 추리공식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화학의 경우 공식으로 표현되는 ‘상황’이 명백하고, 이 상황이 상당히 정밀하게 규정될 수 있음에 반해, 우리의 경험 및 사유의 경우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그 상황이나 조건은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6절 감상평

심리학주의가 논리적 근본법칙을 해석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지만, 그 조건과 결과가 애매하고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챕터. 여전히 이해하긴 어려워서 겨우 읽었지만, 읽었다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하고 모호하다. 논리학을 알았어야지 원..

후설. 논리연구. 5절. 심리학주의의 논리적 근본법칙 해석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5절을 공부하며 정리하였다.

25. *모순율에 대한 밀과 스펜서의 심리학주의적 해석

  • *모순율 [矛盾律, principle of contradiction]: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확립된 논리학의 기본원리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즉 어떤 사물이 같은 대상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A를 하나의 명제로 할 때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며, A의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그 말은 항상 옳지 않다. 따라서, “‘A는 A가 아니다’일 수는 없다” 는 항상 옳은 명제, 즉 논리적 진리의 하나로 된다. 이 진리를 모순율이라고 한다.[출처] 모순율, 동일율, 배중율|작성자 wind0631

밀은 심리학주의적으로 모순율을 경험에서 나온 법칙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모순율을 “믿음과 믿지않음이라는 서로 배척하는 서로 다른 두 정신상태”라는 데서 발견한다

밀은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고, 소음이 있는 곳에는 고요함이 없고, 동등한 곳에는 동등하지 않음이 없고, 앞서감에는 뒤따라감이 없고 등, 어느 하나가 현존하는 곳에서 나머지 다른 하나는 없는 이 첨예한 대립관계에서 모순율이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믿음의 작용들이 우리가 본래의 의미에서 참이나 거짓으로 부를 수 있을 유일한 대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어떻게 명목상 경험의 사실에서 논리법칙의 연관을 수립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편 스펜서는 “의식의 어떤 긍정적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상관적인 부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부정적 양상은 이와 상관적인 긍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밀은 이를 절대적으로 찬성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모순율은 결코 동어반복이 아니며, 모순된 명제의 정의는 그것이 배제된다는 사실을 포함하지 않는다.

26. 원리에 대한 밀의 심리학적 해석은 어떠한 법칙도 산출하지 않고 완전히 모호하고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경험법칙을 산출한다.

그런데 정말 대립된 믿음의 작용이 공존할 수 없는가?

귀납적으로 따져보자. 정말 틀린 추론을 통해 혼란되고 대립된 것을 동시에 참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는가? 그렇다면 그게 법칙인가? 최면상태라면? 열병에 의한 정신착란상태라면?

경험주의자들은 ‘정상적 개인’이나 ‘정상적 사유체제’라는 개념을 들이밀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는 것인가?

밀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 기초가 되는 그 중요한 법칙을 어떤 통찰도 없이 심리학적 메커니즘으로 확신하여, 연상의 맹목적 메커니즘을 지닌 소박한 경험에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는 심지어 실제로 논리학에서 사용되는 그 명제도 아니다.

25와 26의 부록. 경험론의 몇 가지 원리적 결함

경험론과 심리학주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험론의 원리적 결함에 대해 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극단적 경험론은 간접적 인식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고, 그 결과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학문적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다.

극단적 경험론은 결국 경험적 판단만 무비판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간접적 인식이 근거하는 궁극적 원리를 통찰하고자 하는 대신 경험과 귀납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써 더 많은 것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 YJi: 이는 기시감이 있는 대목이다. 질적연구자인 오박사님과의 미팅 시, 박사님은 질적 연구를 통해 본질은 찾는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셨고, 다만 다양한 경험 그 자체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것이 질적 연구자의 몫이라 하셨다. 오박사님은 후설 관점에서는 극단적 경험론자에 가까운 듯..

그런데 그렇다면, 이는 이성적 정당화가 완전히 결여되게 된다. 즉, 경험론의 이론과 학설은 편견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자의적 가정이 되고 말 뿐이다.

27. 논리적 원리를 그 밖의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유사한 반론. 기만의 원천인 애매함.

논리적 법칙의 통찰성은 확고하지만, 그 법칙의 사유내용을 심리학적 사유내용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그 법칙은 즉각 애매해진다.

올바른 사유에서 논리적으로 ‘예’와 ‘아니오’는 명백하게 배척된다. 하지만 이것을 심리학적 명제로 바꾸는 순간, ‘예’와 ‘아니오’의 공존 불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

필증적 명증성을 규정함에 있어 모순은 함께 존속할 수 없다.

28. 사유의 자연법칙으로 파악하는 동시에 이 법칙을 논리적으로 규제하는 규범법칙으로 파악할 수 있을 모순율의 추정적 양면성 (독해가 어려운 꼭지)

현대의 대부분의 독일 논리학자는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사유법칙’의 본질을 밝히려고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순율을 자연법칙이자 규범법칙이라고 주장하고자 하고 있다. 특히 랑에는 모순율을 사유의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이 만나는 점이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호한 경험적 일반성과 논리학에서의 절대적으로 정밀하고 순수한 개념적 법칙은 혼동되어선 안된다.

29. 계속. 지그바르트의 학설 (독해가 어려운 꼭지)

한편 지그바르트는 모순율을 “하나의 자연법칙이었고, 단지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규범법칙의 의미로만 등장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어, 자연법칙일 때 그 원리는 ‘a가 b이고 a가 b가 아니다’를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할 뿐인 반면, 규범법칙일 때 그 원리는 의식 일반의 통일성이 두루 퍼져 있는 불변하는 개념의 범위 전체’에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명제가 어떻게 자연법칙의 성격을 띌 수 있는가? 모순율이 ‘부정하다는 것’의 의미 속에 정초한다면,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와 같이 공식화하여 표현한 자연법칙의 사유내용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5절 감상평

아… 뭔가 잘못됐다.. 이 챕터를 읽기 시작했던 게 4월 19일 인데, 그동안 인터뷰하고 녹취록 정리한답시고 한 20여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더니 글이 아예 안 읽힌다.

어쨌든 논리학자들이 모순율을 대하는 자세를 비판하며,

논리법칙의 근간을 경험적인 것에 두려는 모든 시도는 꺼져~

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뒤에 챕터 읽고 다시 읽으면 좀 더 이해가 될까.. 좀 더 읽어보고 다시 와야겠다.

아 후설.. 왜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

나에게 현상학적 질적연구란 (1): 심층인터뷰를 앞두고

현상학적 질적연구 심층인터뷰를 앞둔 기대감

드디어 박사과정 연구계획서의 IRB 승인을 받아 심층인터뷰에 돌입하게 되었다.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현상학적 질적연구를 위한 인터뷰가 시작되는데, 정말 무척이나 기대된다. 왜냐하면 이 과정은 나를 제대로 훈련 시킬 기회이기 때문이다. 간호사로서 대상자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을 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간호사에게 현상학적 관점이 왜 중요한가

난 현상학을 공부하면서 현상학이야 말로 간호사들이 알아야 할 철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간호사는 대상자의 “삶”을 돌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여러가지를 훈련받는다. 해부생리, 병태생리, 약리 등 지식적인 것 & 주사, 드레싱 등 임상에서 필요한 술기 등 뿐 아니라 대상자와 의사소통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 까지도 훈련받는다.

대상자와의 의사소통은 나의 대상자를 잘 돌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하다. 숙련된 간호사라고 하여 대상자의 표정만 보고, 몸짓만 보고, 그의 필요를 다 알아차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만약 간호사가 현상학적 관점을 장착하고 대상자와 의사소통을 한다면, 그에게 정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현상학적 관점은 짧게 정리해보자면, 1)내가 이미 나의 대상자가 경험하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한 나름의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잠시 그것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내려놓고, 2) 실제로는 그 근거가 구축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대상자의 경험 그 자체에 진정성 있게 다가가고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린 Evidence based 된 실무(근거-기반 실무)를 하도록 훈련받았다.

이는 우리가 간호를 수행할 때 이미 확인된 구체적인 근거에 따라 간호를 제공함으로써, 대상자에게 가장 효과적방식을 자신 있게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이 evidence는 우리 ‘간호 실무’의 과학적 근거이며, ‘간호학’ 존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Evidence-based practice는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그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다보면, 나름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나의 대상자 그 자체는 간과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바일 헬스케어라는 방식이 자가관리에 도움이 된다라는 근거가 축적됨에 따라, 대상자에게 모바일 헬스케어 프로그램을 권하였다고 치자.그런데 대상자는 좀처럼 그걸 사용도 안하고, 자가 관리는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그럼 일단 그 대상자는 compliance가 낮은 대상자로 규정 되기 쉽다.

그런데 그 대상자가 알고 보니 자기 핸드폰이 없다거나, 학교에 있을 때는 핸드폰을 꺼놔야 한다거나, 핸드폰으로 통해 노출되는 특정 이미지나 문구가 신경쓰여서 밖에서는 어플을 킬수 조차 없었다거나, 헬스케어를 한다고 핸드폰을 켰다가 다른 게임에 눈이가서 그 게임만 했다거나, 손가락이 너무 두꺼워서 제대로 터치를 못했다거나, 핸드폰 알림 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거나, 이런것까지 해야하나하고 자기비관속에 있다거나.. 등등등.. 너무나도 많은 주관적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현상학적 관점을 장착한 의사소통은 앞서 언급 하였듯이 나의 대상자가 그 경험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경험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때 이미 과학적으로 효과적이라고 판명된 근거들은 잠시 괄호 안에 묶어둔다. 이건 결코 그 근거가 효과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오롯이 나의 관심을 과학적 근거보다 대상자의 경험, 대상자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에 맞추려는 의지적인 태도변경이다. 이미 확인된 근거를 대상자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그 다음 스텝이 된다.

대상자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대상자를 단순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오직 ‘근거 중심 간호’만의 강조일 수 있다.

간호가 예술이자 과학이라면, ‘근거-중심 간호’ 만큼 ‘대상자 경험-중심 간호’라는 구호가 함께 가야 할 것라고 생각한다.

현상학적 관점 장착 의사소통 트레이닝의 기회

하지만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는 임상 속에서, 대상자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 탐색해 볼 기회는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나름의 공식적인 연구 기회를 통해 의지적으로 현상학적 관점을 장착하여 심층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엄청난 의사소통 훈련과정이지 않겠는가?

난 이 과정이 결국 나에게 효과적으로 현상학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기술을 체화시켜줘서 언젠가는 바쁜 현장에서도 바로바로 발휘할 수 있는 테크닉이 되지 않을까..라는 나름의 기대가 있다. 아자아자아자리~

후설. 논리연구. 4절. 심리학주의의 경험론적 귀결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4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21. 심리학주의자의 관점과 그 논박에서 두 가지 경험론적 귀결의 특징

심리학은 사실 학문이며 경험에서 나온 학문이라는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심리학이 정밀하다기 보다는 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심리학의 법칙이 정밀성을 결여했다면, 그리고 논리학이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다면, 논리학도 모호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논리법칙은 절대적으로 정밀한 것이 아닌가?
  • 혹시 심리학이 정밀한 자연법칙에 근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심리학이 어떤 법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방법은 개별적 사실에서 귀납 하는 것 뿐인데, 이는 정밀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높은 개연성’만 정초하지 않는가?정당화 된 것은 개연성이지 법칙이 아니다.

물론 심리학 등을 포함하는 사실 과학은 그 과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든 법칙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여러 가능성들이 그 사실 과학 내에서 충분히 용인된다.

하지만 이렇듯 사실과학에서 정당한 “가능성”은 논리학에서는 “불합리”할 뿐이다.

22. 고립되어 작동해 이성적 사유를 일으키는 추정적 자연법칙인 사유법칙 (독해하기 어려운 꼭지)

인간은 사유하는 자이며 이는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인간의 올바른 사유 작용을 정의하는 적합성의 본질은 어떤 심리적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곳에 놓여있어야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개연성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사유법칙은 어떤 것도 확실한 것으로 판정할 수 없다.

또한 ‘판단’ 자체와 ‘판단의 내용’으로서의 법칙은 엄연히 다르다. 즉 법칙과 법칙에 대한 인식작용은 다르다.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은 다르다!

논리 법칙이 사유를 인과적으로 지배한다고 하여, 이를 사유작용의 인과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리학주의 논리학자는

  •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은 다르고
  • 규범화하는 규제와 인과적 규제는 다르며
  • 논리적 필요성과 실재적 필연성도 다르고
  • 논리적 근거와 실재적 근거도 다르다

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23. 심리학주의의 세 번째 귀결과 그 논박

  • 논리법칙이 그 인식의 원천을 심리학적 사실성에 가진다고 주장하는가?

이는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만약 논리법칙이 심리학적 사실을 규범적으로 전환한 것이라면, 논리법칙 자체가 심리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인데, 어떠한 논리법칙도 ‘사실의 문제’를 함축하지 않고, 어떠한 인식현상도 함축하지 않는다.

당연히 경험적 법칙은 사실의 내용을 갖으며, 사실에 관한 법칙일 뿐 아니라 사실의 현존도 포함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인식의 척도에 따라 이론적으로 정초된 최고 권위를 지닌 개연성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순수논리법칙은 절대적 정밀함 속에 명료하게 정초되며, 명백하게 모호한 부분을 지닌 개연성에 정초하지 않는다. 논리 법칙은 실질적으로 한정된 영역 안에 적용되지만,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진리로 작동한다.

24. 계속

이런 논리법칙은 경험적으로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논리 법칙은 경험에 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 논리법칙이 귀납적이진 않다. 우리가 사태를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귀납이 필요하지 않고, 귀납의 불완전함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저 책상의 3권의 책이, 저 서랍장의 2권의 책보다 많다는 사실. 귀납의 불완전함은 어디에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심리학적 종속성은 심리적 연관에 관계하고, 시간적으로 규정이 되지만, 논리적 법칙은 명백히 근거와 결론의 객관적 관계에 따르고, 시간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린 이념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의 근본적 차이, 그리고 이에 따른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4절 감상평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약간 이해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수의 법칙으로 논리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가 쉬웠다.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법칙을 생각해보자.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사실은 물론 생활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책 2권보다 3권이 많다는 것. 그냥 바로 알아차려진다.

하지만 3이 2보다 크다는 것은 실재로 그 사태가 벌어졌음과도 무관하고(책 2권, 책 3권이 있음의 여부) 시간과도 무관한 것이다(지금이든 어제든 내일이든.. 상관 없이 적용됨). 결국 이러한 논리 법칙은 실제 경험에서 심리학적으로 귀납적으로 발견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런 모호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설은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이토록 치열하게 하고 있다. 후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 분명하다.

후설. 논리연구. 3절. 심리학주의, 그 논증과 통상적 반증에 대한 견해

앞서 1절과 2절에서 논리학은 기술적이고, 규범적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규범적인 논리학은 이론적 기틀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설은 이에 이어 논리연구 3절에서 논리학의 이론적 기틀이 과연 심리학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17. 규범적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가 심리학에 있는지의 쟁점

그렇다면 어떤 이론적 학문이 학문이론의 본질적 기초를 제공하는가?

현재는 심리학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 논리적 기술학에 유일하고도 충분한 이론적 기초를 준다고 이야기 한다. 밀은 “논리학의 이론적 토대는 총체적으로 심리학에 의거하며, 기술의 규칙들을 정초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심리학에 포함한다”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18. 심리학주의자의 논증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어떤 소재를 기술적으로 처리하였는지가 그 소재의 성질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게 되는데, 인식을 처리하는 규칙을 다루는 논리학은 당연 심리학에 귀속되지 않겠나?”

19. 이에 대립된 측의 통상적 논증과 심리학 주의의 응답

반대 입장: “논리학은 사유작용의 규범 법칙을 다루고, 심리학은 사유작용의 자연법칙을 다룬다. 논리학의 원리를 심리학에서, 즉 우리의 오성을 관찰한 것에서 찾는다면 사유작용의 우연적 법칙에 대한 인식으로 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의 우연적 규칙이 아니라 필연적 규칙을 추구한다”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오성의 필연적 규칙도 사유 작용의 법칙의 특수한 한가지 경우에 불과하다.특수한 경우라고 하여 심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반대 입장: “근본적으로 심리학의 과제와 논리학의 과제가 다르다. 심리학의 법칙은 심리와 경과를 인과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하지만 논리학은 그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진리의 내용, 즉 참인 결과를 위해 필요한 성질과 필요한 경과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그런데 논리학도 인과적 연관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으며, 자연적 연관을 연구하지 않고 이념적 연관을 추구할 수는 없다.”

반대입장: “논리학은 심리학에 기초를 둘 수 없다. 모든 학문이 논리학과 규칙과 조화를 이룸으로써만 학문이기 때문이다. 심리학도 논리에 근거할 때 심리학일 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순환론이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이는 논리적 규칙에 따라 추론하는 것과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을 동일시한 관점이다. 심리학이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되는것인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 YJi: 즉, 후설은 심리학주의자들이 심리학이 논리학의 이론적 기반이라고 하는 것에 반박하고자 하지만, 당시까지 그러한 심리학주의자에 대한 반대입장의 논지가 튼튼하지 못했음 또한 지적하고 있다.

20. 심리학주의자들의 논증이 놓친 빈틈

후설의 입장: 심리학주의자의 논쟁을 통해 확인 된 것은, 단지 심리학이 논리학을 기초짓는데 함께 관여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어디에도 심리학이 논리학에 본질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심리학에 독립적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이끌어 갈 ‘순수논리학’이 자리 잡을 곳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모든 논리적 규제가 궁극적으로 관련되고 그래서 논리적 진리에 관해 논의하는 경우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만 할 질리가 곧바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진리 속에서 논리학 전체에 본질적인 것을 쉽게 보게되고 그 진리의 이론적 통일을 ‘순수논리학’이라는 명칭으로 쉽게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써 (순수논리학의) 참된 상태가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실제로 입증할 수 있기 바란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3절 감상평

요약해보자면,

논리학은 실천적 기술학이고, 규범학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 규범적 명제가 타당화될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이론이 심리학에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심리학주의자의 의견(즉, 모든 사유작용에 대한 법칙은 심리학에 귀속된다)에 대한 반대 입장은 논리학의 규범적 특성에 기반하여 있어왔으나 그 논리가 부실한 수준이었다. 한편 너무나도 자명해보였던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또한 허점이 있었으니, 심리학이 논리학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논리학의 본질적 기초가 된다고 증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순수논리학이 필요하다.

라는 뜻인 것 같다.

확실히, 인간의 논리적 사유작용을 생각해볼 때 이는 심리학과 무관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 규범적인(당위적인) 특성을 심리학에서의 우연적 인과법칙에서 찾는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도 맞고, 이런 심리학만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기초가 된다고 보긴 어렵긴 어렵겠다. 어쨌든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심리학은 그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심리학이 아니고서, 순수 논리학이라 할지라도, 과연 인간이 그 사유의, 논리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하는 순수 논리학을 전개해나갈 수 있을까?

내용은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고있다. 그리고 순수논리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과연 후설이 찾아갈 순수논리학이란 것이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제시하는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수 있을지는 궁금하다. 아니면 사유의 필연적 법칙 이야기를 하는 건 반심리주의학 입장이고, 후설은 이것까지 찾으려는 건 아닌건가..?

여전히 어렵다. 어려워.. 뭐.. 일단 후설 선생님의 글을 읽어가곤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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