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논리연구. 6절. 심리학주의의 조명에서 삼단논법 추론. 추론공식과 화학공식.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6절을 공부하며 정리하였다.

30. 삼단논법의 명제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도

삼단논법도 심리학적 법칙이라고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한번 “모순적 명제는 함께 참일 수 없다.”는 논리법칙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을 한번 따져보자.

정말 그런가? 라고 따져가는 가운데 만약 눈에 띄지 않았던 모순이 그 추리 과정 과정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면, 기존의 추리 방식은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언제나 심리학적으로 이해되는 것이고, 사유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

31. 추리공식과 화학공식

심지어 헤이만스는 ‘사유의 경험법칙’을 화학 공식과 같이 추리공식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화학의 경우 공식으로 표현되는 ‘상황’이 명백하고, 이 상황이 상당히 정밀하게 규정될 수 있음에 반해, 우리의 경험 및 사유의 경우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그 상황이나 조건은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6절 감상평

심리학주의가 논리적 근본법칙을 해석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지만, 그 조건과 결과가 애매하고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챕터. 여전히 이해하긴 어려워서 겨우 읽었지만, 읽었다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하고 모호하다. 논리학을 알았어야지 원..

후설. 논리연구. 5절. 심리학주의의 논리적 근본법칙 해석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5절을 공부하며 정리하였다.

25. *모순율에 대한 밀과 스펜서의 심리학주의적 해석

  • *모순율 [矛盾律, principle of contradiction]: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확립된 논리학의 기본원리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즉 어떤 사물이 같은 대상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A를 하나의 명제로 할 때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며, A의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그 말은 항상 옳지 않다. 따라서, “‘A는 A가 아니다’일 수는 없다” 는 항상 옳은 명제, 즉 논리적 진리의 하나로 된다. 이 진리를 모순율이라고 한다.[출처] 모순율, 동일율, 배중율|작성자 wind0631

밀은 심리학주의적으로 모순율을 경험에서 나온 법칙으로 선언한다. 그리고 모순율을 “믿음과 믿지않음이라는 서로 배척하는 서로 다른 두 정신상태”라는 데서 발견한다

밀은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없고, 소음이 있는 곳에는 고요함이 없고, 동등한 곳에는 동등하지 않음이 없고, 앞서감에는 뒤따라감이 없고 등, 어느 하나가 현존하는 곳에서 나머지 다른 하나는 없는 이 첨예한 대립관계에서 모순율이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믿음의 작용들이 우리가 본래의 의미에서 참이나 거짓으로 부를 수 있을 유일한 대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어떻게 명목상 경험의 사실에서 논리법칙의 연관을 수립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편 스펜서는 “의식의 어떤 긍정적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상관적인 부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부정적 양상은 이와 상관적인 긍정적 양상을 배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다.”라고 하였고, 밀은 이를 절대적으로 찬성하였다.

후설 입장: 하지만 이는 단순한 동어반복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모순율은 결코 동어반복이 아니며, 모순된 명제의 정의는 그것이 배제된다는 사실을 포함하지 않는다.

26. 원리에 대한 밀의 심리학적 해석은 어떠한 법칙도 산출하지 않고 완전히 모호하고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경험법칙을 산출한다.

그런데 정말 대립된 믿음의 작용이 공존할 수 없는가?

귀납적으로 따져보자. 정말 틀린 추론을 통해 혼란되고 대립된 것을 동시에 참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는가? 그렇다면 그게 법칙인가? 최면상태라면? 열병에 의한 정신착란상태라면?

경험주의자들은 ‘정상적 개인’이나 ‘정상적 사유체제’라는 개념을 들이밀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도대체 어떻게 규정되는 것인가?

밀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 기초가 되는 그 중요한 법칙을 어떤 통찰도 없이 심리학적 메커니즘으로 확신하여, 연상의 맹목적 메커니즘을 지닌 소박한 경험에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이는 심지어 실제로 논리학에서 사용되는 그 명제도 아니다.

25와 26의 부록. 경험론의 몇 가지 원리적 결함

경험론과 심리학주의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험론의 원리적 결함에 대해 좀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극단적 경험론은 간접적 인식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할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고, 그 결과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학문적 가능성을 파기하고 있다.

극단적 경험론은 결국 경험적 판단만 무비판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간접적 인식이 근거하는 궁극적 원리를 통찰하고자 하는 대신 경험과 귀납을 정당화하는 것으로써 더 많은 것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 YJi: 이는 기시감이 있는 대목이다. 질적연구자인 오박사님과의 미팅 시, 박사님은 질적 연구를 통해 본질은 찾는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셨고, 다만 다양한 경험 그 자체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것이 질적 연구자의 몫이라 하셨다. 오박사님은 후설 관점에서는 극단적 경험론자에 가까운 듯..

그런데 그렇다면, 이는 이성적 정당화가 완전히 결여되게 된다. 즉, 경험론의 이론과 학설은 편견보다도 나을 것이 없는, 자의적 가정이 되고 말 뿐이다.

27. 논리적 원리를 그 밖의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유사한 반론. 기만의 원천인 애매함.

논리적 법칙의 통찰성은 확고하지만, 그 법칙의 사유내용을 심리학적 사유내용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그 법칙은 즉각 애매해진다.

올바른 사유에서 논리적으로 ‘예’와 ‘아니오’는 명백하게 배척된다. 하지만 이것을 심리학적 명제로 바꾸는 순간, ‘예’와 ‘아니오’의 공존 불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

필증적 명증성을 규정함에 있어 모순은 함께 존속할 수 없다.

28. 사유의 자연법칙으로 파악하는 동시에 이 법칙을 논리적으로 규제하는 규범법칙으로 파악할 수 있을 모순율의 추정적 양면성 (독해가 어려운 꼭지)

현대의 대부분의 독일 논리학자는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사유법칙’의 본질을 밝히려고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순율을 자연법칙이자 규범법칙이라고 주장하고자 하고 있다. 특히 랑에는 모순율을 사유의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이 만나는 점이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호한 경험적 일반성과 논리학에서의 절대적으로 정밀하고 순수한 개념적 법칙은 혼동되어선 안된다.

29. 계속. 지그바르트의 학설 (독해가 어려운 꼭지)

한편 지그바르트는 모순율을 “하나의 자연법칙이었고, 단지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규범법칙의 의미로만 등장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어, 자연법칙일 때 그 원리는 ‘a가 b이고 a가 b가 아니다’를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할 뿐인 반면, 규범법칙일 때 그 원리는 의식 일반의 통일성이 두루 퍼져 있는 불변하는 개념의 범위 전체’에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부정하는 의미’를 확립하는 명제가 어떻게 자연법칙의 성격을 띌 수 있는가? 모순율이 ‘부정하다는 것’의 의미 속에 정초한다면,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와 같이 공식화하여 표현한 자연법칙의 사유내용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5절 감상평

아… 뭔가 잘못됐다.. 이 챕터를 읽기 시작했던 게 4월 19일 인데, 그동안 인터뷰하고 녹취록 정리한답시고 한 20여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더니 글이 아예 안 읽힌다.

어쨌든 논리학자들이 모순율을 대하는 자세를 비판하며,

논리법칙의 근간을 경험적인 것에 두려는 모든 시도는 꺼져~

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뒤에 챕터 읽고 다시 읽으면 좀 더 이해가 될까.. 좀 더 읽어보고 다시 와야겠다.

아 후설.. 왜 이렇게까지 해야했을까..

후설. 논리연구. 4절. 심리학주의의 경험론적 귀결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4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21. 심리학주의자의 관점과 그 논박에서 두 가지 경험론적 귀결의 특징

심리학은 사실 학문이며 경험에서 나온 학문이라는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심리학이 정밀하다기 보다는 모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런데 심리학의 법칙이 정밀성을 결여했다면, 그리고 논리학이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다면, 논리학도 모호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논리법칙은 절대적으로 정밀한 것이 아닌가?
  • 혹시 심리학이 정밀한 자연법칙에 근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심리학이 어떤 법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방법은 개별적 사실에서 귀납 하는 것 뿐인데, 이는 정밀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높은 개연성’만 정초하지 않는가?정당화 된 것은 개연성이지 법칙이 아니다.

물론 심리학 등을 포함하는 사실 과학은 그 과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든 법칙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여러 가능성들이 그 사실 과학 내에서 충분히 용인된다.

하지만 이렇듯 사실과학에서 정당한 “가능성”은 논리학에서는 “불합리”할 뿐이다.

22. 고립되어 작동해 이성적 사유를 일으키는 추정적 자연법칙인 사유법칙 (독해하기 어려운 꼭지)

인간은 사유하는 자이며 이는 자연법칙이다.

그런데 인간의 올바른 사유 작용을 정의하는 적합성의 본질은 어떤 심리적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곳에 놓여있어야 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 개연성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사유법칙은 어떤 것도 확실한 것으로 판정할 수 없다.

또한 ‘판단’ 자체와 ‘판단의 내용’으로서의 법칙은 엄연히 다르다. 즉 법칙과 법칙에 대한 인식작용은 다르다. 이념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은 다르다!

논리 법칙이 사유를 인과적으로 지배한다고 하여, 이를 사유작용의 인과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리학주의 논리학자는

  •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은 다르고
  • 규범화하는 규제와 인과적 규제는 다르며
  • 논리적 필요성과 실재적 필연성도 다르고
  • 논리적 근거와 실재적 근거도 다르다

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23. 심리학주의의 세 번째 귀결과 그 논박

  • 논리법칙이 그 인식의 원천을 심리학적 사실성에 가진다고 주장하는가?

이는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

만약 논리법칙이 심리학적 사실을 규범적으로 전환한 것이라면, 논리법칙 자체가 심리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인데, 어떠한 논리법칙도 ‘사실의 문제’를 함축하지 않고, 어떠한 인식현상도 함축하지 않는다.

당연히 경험적 법칙은 사실의 내용을 갖으며, 사실에 관한 법칙일 뿐 아니라 사실의 현존도 포함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인식의 척도에 따라 이론적으로 정초된 최고 권위를 지닌 개연성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순수논리법칙은 절대적 정밀함 속에 명료하게 정초되며, 명백하게 모호한 부분을 지닌 개연성에 정초하지 않는다. 논리 법칙은 실질적으로 한정된 영역 안에 적용되지만, 여러 가능성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진리로 작동한다.

24. 계속

이런 논리법칙은 경험적으로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논리 법칙은 경험에 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 논리법칙이 귀납적이진 않다. 우리가 사태를 단번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귀납이 필요하지 않고, 귀납의 불완전함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저 책상의 3권의 책이, 저 서랍장의 2권의 책보다 많다는 사실. 귀납의 불완전함은 어디에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또한 심리학적 종속성은 심리적 연관에 관계하고, 시간적으로 규정이 되지만, 논리적 법칙은 명백히 근거와 결론의 객관적 관계에 따르고, 시간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우린 이념적 대상과 실재적 대상의 근본적 차이, 그리고 이에 따른 이념적 법칙과 실재적 법칙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4절 감상평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약간 이해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수의 법칙으로 논리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가 쉬웠다.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법칙을 생각해보자. 2개보다 3개가 많다는 사실은 물론 생활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책 2권보다 3권이 많다는 것. 그냥 바로 알아차려진다.

하지만 3이 2보다 크다는 것은 실재로 그 사태가 벌어졌음과도 무관하고(책 2권, 책 3권이 있음의 여부) 시간과도 무관한 것이다(지금이든 어제든 내일이든.. 상관 없이 적용됨). 결국 이러한 논리 법칙은 실제 경험에서 심리학적으로 귀납적으로 발견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런 모호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설은 논리학이 심리학에 근거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이토록 치열하게 하고 있다. 후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 분명하다.

후설. 논리연구. 3절. 심리학주의, 그 논증과 통상적 반증에 대한 견해

앞서 1절과 2절에서 논리학은 기술적이고, 규범적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규범적인 논리학은 이론적 기틀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설은 이에 이어 논리연구 3절에서 논리학의 이론적 기틀이 과연 심리학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17. 규범적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가 심리학에 있는지의 쟁점

그렇다면 어떤 이론적 학문이 학문이론의 본질적 기초를 제공하는가?

현재는 심리학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라는 관점이 우세하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 논리적 기술학에 유일하고도 충분한 이론적 기초를 준다고 이야기 한다. 밀은 “논리학의 이론적 토대는 총체적으로 심리학에 의거하며, 기술의 규칙들을 정초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심리학에 포함한다”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18. 심리학주의자의 논증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어떤 소재를 기술적으로 처리하였는지가 그 소재의 성질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게 되는데, 인식을 처리하는 규칙을 다루는 논리학은 당연 심리학에 귀속되지 않겠나?”

19. 이에 대립된 측의 통상적 논증과 심리학 주의의 응답

반대 입장: “논리학은 사유작용의 규범 법칙을 다루고, 심리학은 사유작용의 자연법칙을 다룬다. 논리학의 원리를 심리학에서, 즉 우리의 오성을 관찰한 것에서 찾는다면 사유작용의 우연적 법칙에 대한 인식으로 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의 우연적 규칙이 아니라 필연적 규칙을 추구한다”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오성의 필연적 규칙도 사유 작용의 법칙의 특수한 한가지 경우에 불과하다.특수한 경우라고 하여 심리학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부조리하다.”

반대 입장: “근본적으로 심리학의 과제와 논리학의 과제가 다르다. 심리학의 법칙은 심리와 경과를 인과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하지만 논리학은 그 인과적 결과가 아니라 진리의 내용, 즉 참인 결과를 위해 필요한 성질과 필요한 경과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그런데 논리학도 인과적 연관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는 없으며, 자연적 연관을 연구하지 않고 이념적 연관을 추구할 수는 없다.”

반대입장: “논리학은 심리학에 기초를 둘 수 없다. 모든 학문이 논리학과 규칙과 조화를 이룸으로써만 학문이기 때문이다. 심리학도 논리에 근거할 때 심리학일 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순환론이다.”

이에 대한 후설의 입장: “이는 논리적 규칙에 따라 추론하는 것과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을 동일시한 관점이다. 심리학이 논리적 규칙으로부터 추론되는것인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 YJi: 즉, 후설은 심리학주의자들이 심리학이 논리학의 이론적 기반이라고 하는 것에 반박하고자 하지만, 당시까지 그러한 심리학주의자에 대한 반대입장의 논지가 튼튼하지 못했음 또한 지적하고 있다.

20. 심리학주의자들의 논증이 놓친 빈틈

후설의 입장: 심리학주의자의 논쟁을 통해 확인 된 것은, 단지 심리학이 논리학을 기초짓는데 함께 관여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어디에도 심리학이 논리학에 본질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심리학에 독립적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이끌어 갈 ‘순수논리학’이 자리 잡을 곳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모든 논리적 규제가 궁극적으로 관련되고 그래서 논리적 진리에 관해 논의하는 경우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만 할 질리가 곧바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진리 속에서 논리학 전체에 본질적인 것을 쉽게 보게되고 그 진리의 이론적 통일을 ‘순수논리학’이라는 명칭으로 쉽게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써 (순수논리학의) 참된 상태가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실제로 입증할 수 있기 바란다.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3절 감상평

요약해보자면,

논리학은 실천적 기술학이고, 규범학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 규범적 명제가 타당화될 이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이론이 심리학에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심리학주의자의 의견(즉, 모든 사유작용에 대한 법칙은 심리학에 귀속된다)에 대한 반대 입장은 논리학의 규범적 특성에 기반하여 있어왔으나 그 논리가 부실한 수준이었다. 한편 너무나도 자명해보였던 심리학주의자의 입장 또한 허점이 있었으니, 심리학이 논리학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논리학의 본질적 기초가 된다고 증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순수논리학이 필요하다.

라는 뜻인 것 같다.

확실히, 인간의 논리적 사유작용을 생각해볼 때 이는 심리학과 무관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 규범적인(당위적인) 특성을 심리학에서의 우연적 인과법칙에서 찾는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도 맞고, 이런 심리학만이 논리학의 본질적인 기초가 된다고 보긴 어렵긴 어렵겠다. 어쨌든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심리학은 그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심리학이 아니고서, 순수 논리학이라 할지라도, 과연 인간이 그 사유의, 논리의, 필연적 법칙을 규명하는 순수 논리학을 전개해나갈 수 있을까?

내용은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고있다. 그리고 순수논리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과연 후설이 찾아갈 순수논리학이란 것이 사유의 필연적 법칙을 제시하는 논리학만의 본질적 기초가 될 수 있을지는 궁금하다. 아니면 사유의 필연적 법칙 이야기를 하는 건 반심리주의학 입장이고, 후설은 이것까지 찾으려는 건 아닌건가..?

여전히 어렵다. 어려워.. 뭐.. 일단 후설 선생님의 글을 읽어가곤 있긴 하다.

후설. 논리연구. 2절. 규범적 분과의 기초로서 이론적 분과

후설의 논리연구 1권의 2절을 정리하며 공부하였다.

13.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관한 논쟁

앞서 논의한 것과 같이 논리학은 실천적 성격을 띈 기술학이라고 정당화 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논리학의 기술적 성격에 대해 부인하는 입장이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칸트는 우리가 올바로 *오성을 사용하는 것을 규제하는 임무를 맡은 응용논리학에 대해 이야기 했다.

  • *(칸트의) 오성: 감성 및 이성 다른 두 능력에 대비하여 대상을 구성하는 개념 작용의 능력인 지력 –>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생긴다.’

여기서 응용논리학은 오성(개념 작용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치유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응용논리학을 한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완전한 독립학문으로, 순수이론적 학문으로 현존시켰다.

결국 두 가지의 입장이 대치되게 된다.

  • 기술학으로 파악된 모든 논리학은 고유한 이론적 학문, 즉 ‘순수논리학’을 기초로 한다 (칸트, 헤르바르트, 베인, 드로비슈 등).
  • 논리적 기술학 속에서 확인되는 모든 이론적 학설은 타 학문에 포함된다. 즉 그 자체적으로 근거하는 고유의 이론은 없다 (베네케, 밀, 지그바르트 등)

이 두 가지의 입장은 모두 논리학의 실천적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무엇이 맞는가에 대한 논쟁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앞서 논의하였듯이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학문 자체에 대한 논쟁이며, 그러한 논쟁이 있음은 그 학문이 아직 불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규범적 학문의 개념. 규범적 학문에 통일성을 주는 근본척도 또는 원리

잠시 규범적 학문이란 무엇인지 따져보자.

규범이란 실재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더라도,’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위해 우린 여러 종류의 규범적 명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너는 내 말에 따라야만 한다’, ‘군인은 용감해야만 한다’, ‘인간은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 등등). 이 규범적 명제에서는 어떤 부류의 대상에 대해 일정한 의미에서 ‘좋은'(가치 있는) 또는 ‘나쁜'(무가치한)의 개념이 생기는 가치 태도를 전제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 태도에서 우리는 ‘더 좋은’과 ‘가장 좋은’, 그리고 ‘더 나쁜’과 ‘가장 나쁜’ 등을 구별하며 무엇이 그러한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에 대해 더 가까운 조건이고, 먼 조건인지, 혹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인지 등을 따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그 가치를 최대로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는 규범적 명제를 가질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근본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들어 칸트 윤리학의 ‘정언명법’, 혹은 공리주의자의 윤리학에서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등이 이에 해당 된다. 이 때 이 근본 규범은 어떤 것이 규범화 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해줄 뿐, 어떤 규범적 명제도 서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때 이 근본 규범의 총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목표를 세운다면, 그것은 규범적 분과의 이념이 생긴다.

즉, 각각의 규범적 학문은 자신의 고유한 근본 규범을 갖고, 이 근본 규범은 그때그때 규범적 분과의 통일원리를 서술한다.

15. 규범적 분과와 기술학

특히 우리는 실재적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관심이 있으므로, 규범적 분과의 개념을 기술학의 개념과 동일하게 간주하려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모든 기술학은 규범적이라고 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술학은 근본 규범이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의 특수한 경우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술학은 실천적이지 않은 분과 또한 포함한다. 왜냐하면 기술학의 과제는 실천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목적을 다룬다기보다, 우선 실현할 수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규범을 확립하는데 더 좁은 과제가 해결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적 가치태도가 그에 상응하는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변하는 모든 규범적 분과는 기술학으로 확장된다.

16. 규범적 분과의 기초인 이론적 분과

근본규범(또는 근본가치, 궁극적 목적)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분과들의 통일을 규정한다. 또한 근본규범은 규범화하는 생각을 그 분과의 모든 규범적 명제로 갖고 들어온다. 그러나 근본규범에서 측정한다는 이러한 공통적 생각 이외에 이 규범적 명제는 다른 명제와 구별되는 고유한 이론적 내용을 갖는다. 각각의 규범적 명제는 규범(Norm)과 규범화된 것(Normiertes) 사이의 측정하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형식의 모든 규범적 명제는 오직 ‘B인 A만이 C의 성질을 갖는다’는 이론적 명제를 포함한다.

  • YJi: 예를 들어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는 ‘전인적인 간호만이 진정한 간호이다’라는 간호학의 이론적 명제를 포함하며, 여기서 ‘진정한 간호’라는 새로운 명제는 순수 이론적 명제이고, 어떤 규범화하는 판단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C자체에 대한 가치 태도가 생기면, 그에 따라 ‘오직 B인 A만이 좋은 것이다’, ‘A는 마땅히 B이어야만 한다.’는 규범적 형식을 받아들일수 있다.

  • YJi: 즉, ‘진정한 간호’라는 명제에 대한 가치태도가 생길 때 ‘간호는 전인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규범적 형식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C의 존재는 규범적 학문의 명제 속에 끼워져 있는 이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일정한 이론적 학문 속에서 논리적 자리를 가져가야만 한다.

따라서 규범적 학문이 자신의 명칭에 걸맞아야하면, 규범화할 수 있는 사태와 근본규범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규명해야 하면, 규범적 학문은 이러한 관계의 이론적 핵심내용을 반드시 연구하고 그래서 관련된 이론적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모든 규범적 분과는 어떤 규범도 아닌 진리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규범적 학문의 본질적인 이론적 기초는 어떠해야 하는가?

Ref. Edmund Husserl(2018). 논리연구 1 (이종훈,역). 서울: 민음사. (원서출판 1900).

논리연구 1권 2절 감상평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 우리는 1절에서 논리학이 기술학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기술학인 논리학은 그만의 독립적인 이론적 기틀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학문을 기틀로 하는가?
  • 앞서 논의하였듯이 논리학은 규범적이라 한 것을 짚어보면, 규범적인 학문은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 고유한 근본규범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통일체를 이룬다. 따라서 그 근본규범은 일정한 이론적 체계 내에 있어야 한다.

뭐 이런 뜻인 것 같다. 누가 동화책같이 써둔 것은 없을까? 독해가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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